오직 한 가지 관심사로만 이뤄진 관계가 일차원 우정이다. 공통관심사는 취미에서 진로, 공통의 적, 교육 철학, 신앙까지 다양하다. 일차원 우정은 ‘일치’를 우선시한다. 그래서 서로의 견해나 신념,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맹점도 지적하지 않는다. 이런 우정 관계에서는 다양성에서 비롯하는 자연스럽고, 구원하고, 인격을 키워 주는 긴장이 발생할 수 없다. 유명인사끼리만, 아이가 있는 사람끼리만, 결혼한 사람끼리만(혹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끼리만), 운동 마니아끼리만, 같은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끼리만, 젊은 세대끼리만(혹은 나이 든 세대끼리만), 그리스도인끼리만, 백인끼리만(혹은 유색 인종끼리만), 논리적인 사람끼리만(혹은 감성적인 사람끼리만), 부유한 사람끼리만, 즉 같은 부류끼리만 어울리면 관계는 반드시 빈곤해진다. 일차원 우정이 겉으로는 끈끈해 보여도 처음 서로에게 끌린 한 가지 면이 보다 광범위하고 깊은 차원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피상적인 우정에 머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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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 나 자신이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막연하고도 불안한 느낌. 이 수치는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고 남들의 어려움에는 무관심하게 만든다. 수치는 먼저 자신부터 고쳐야 다른 이를 섬길 수 있다고 말한다. 수치는 친구와 이웃들, 특히 가난하고 외롭고 억압받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작은 유익이라도 끼칠 수 있으려면 더러운 자신부터 씻어야 한다고 말한다. 수치는 먼저 자신이 괜찮아야 남을 잘 돌볼 수 있다고 말한다. 수치는 자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한다.
--- p.37-38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출발점은 그저 쉬면서 받는 것이다. 출발점은 멈추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분과 ‘함께하는’ 게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할수록 그분을 더 닮아 가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루는 것이라기보다는 빠지는 것이다. 사랑을 가까이 하면 그 사랑에 물든다.
--- p.55-56
〈뉴욕 타임스〉 기자 팀 크레이더는 끊임없이 화낼 대상을 찾는 세태를 표현하기 위해 “분노 포르노”(outrage porn)란 용어를 만들어 냈다. 편집자에게 날아온 수백 개의 댓글과 편지를 토대로 그는 많은 현대인이 누군가를 가해자로 몰아 자신이 옳다는 느낌을 얻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분노 포르노는 아무런 개인적인 책임 없이 다른 인간을 희생시키며 싸구려 쾌감을 맛본다는 점에서 포르노와 유사하다. 분노 포르노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남들에게 공개적으로 망신 주길 좋아하는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의 바리새인도 남을 경멸하기로 유명했다(눅 18:9 참조).
--- p.83
병든 가정 안에서는 사랑이 식어 적대감으로 변하고 결국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다. 병든 가정 안에서는 배우자가 모르고 저지른 실수를 고의적인 잘못으로, 깜박 잊은 것을 원래 부주의한 것으로, 피곤을 게으름으로, 합당한 지적을 분노로, 건설적인 비판을 가혹한 거부로, 사과를 속임수로, 용서를 생색으로 매도한다. 이렇게 상대방을 좋게 봐주지 않고 동기를 의심하고, 남편과 아내가 매일같이 서로에게 으르렁거리고, 겸손한 사과와 은혜와 용서가 사라지면, 그것은 더 깊은 차원에서 병들어 있다는 신호다. 대개 그것은 둘 중 한 사람 혹은 둘 다 상대방을 구원자요 진북(true north)으로 여길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상대방을 행복과 만족, 의미의 궁극적인 ‘근원’으로 보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 p.135
우리가 왜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의 신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의 관점에서 ‘우리’는 세상 끝에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분께 우리는 그분이 처음 거두신 열두 제자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가 굶주릴 때 그분이 먹이셨다. ‘우리’가 목마를 때 그분이 마실 것을 주셨다. ‘우리’가 집 없이 떠돌 때 그분이 오셔서 거처를 마련해 주셨다. ‘우리’가 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거짓 포도나무에서 시들고 있을 때 그분이 우리를 자신에게 접붙이셨다. ‘우리’가 부유한 가운데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살고 있을 때 그분이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를 위한 그분의 식탁에 불러 주셨다. ‘우리’가 죽고 있을 때 우리가 살도록 그분이 우리 대신 돌아가셨다. 그분은 우리가 난민 신세에서 벗어나 영원한 집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스스로 난민이 되셨다. 그러니 우리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누군가를 섬기는 게 어떤가?
--- p.239-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