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R는 약탈을 용이하게 하고자 점령지를 여덟 지역으로 나누고 음악, 시각예술, 역사, 도서관, 교회 등 5개 실무분야로 구분했다. ERR의 직접적인 약탈 대상은 나치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의 소유물이었다. ERR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1940년 11월에서 1944년 7월까지 파리의 개인 컬렉션 203곳에서 2만 1903점을 강탈했다. 1941년 4월부터 1944년 7월까지 ERR가 파리에서 독일의 약탈품 주요 보관소인 남부 바이에른주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운반한 약탈품 분량이 화물열차로 1418칸에 이른다. 이와는 별도로 선박으로 42만 7000톤을 실어 날랐다.
--- p.63~64
모든 지휘관에게 보낸 서신 명령에서 아이젠하워는 문화적으로 중요한 구조물에 대한 약탈, 파괴, 모독을 금지함으로써 MFAA, 즉 ‘모뉴먼츠 맨’의 활동을 지원했다. 또 아이젠하워는 될 수 있는 한 MFAA를 돕도록 반복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런 명령과 활동은 군대가 전쟁을 치르는 동시에 문화재를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훼손을 줄이도록 한 것으로, 전쟁 역사상 처음이라고 MFAA 활동을 기리는 미국 ‘모뉴먼츠 맨 재단’은 밝히고 있다.
--- p.82
나치의 가장 유명한 거대 약탈 예술품 보관소로 오스트리아 알타우제 소금 광산을 들 수 있다. 광산 터널 길이만 64킬로미터에 이르는 미로 같은 소금 광산에서 그림 6577점, 조각 137점, 공예품 484상자를 비롯해 도서관 장서, 가구와 동전, 무기 등이 발견되었다. MFAA는 독일 남부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 가구와 보석 등과 함께 6000점 이상의 그림을 발견했고, 1945년 4월 독일 중부 산악지대인 메르커스 소금 광산에서는 예술품을 담은 상자 수천 개와 대량의 금괴(2017년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유로 상당)도 찾아냈다. 이곳에서는 특히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의 개인 소지품과 금니 등이 무더기로 나와 그 비참함을 더했다. 나치가 예술품을 숨기는 창고로 이용한 소금 광산은 온도와 습도가 자동으로 일정하게 유지되고, 미생물의 공격을 막는 천연 저장고였다.
--- p.84~88
소련은 자신들이 약탈한 예술품이 나치 독일의 재산인지, 개인 소장품인지에 상관없이 가져감으로써 논란을 일으켰다. 적군이 약탈한 예술품 상당수는 나치의 약탈품이었고, 곧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유물이었다. 전쟁 기간 소련이 계속해서 그리고 의도적으로 점령지에서 저지른 문화재 약탈 행위를 같은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 숨겼다는 것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두 진영이 서로 불신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리품 부대를 비밀리에 운영한 것은 소비에트가 서방 국가들을 공개적이지는 않지만, 적으로 간주했다는 의미다.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서막이 올랐다.
--- p.123
로스차일드 문서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 거의 10년 만인 2002년 6월 러시아는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군사문서고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서 상자 29개를 꺼내주고 황제의 연애편지 등을 받으면서 ‘교환’ 형식으로 회복이 이루어졌다. 돌려받은 문헌들은 런던에 있는 로스차일드 문서보관소로 들어갔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중으로 약 탈당한 기록물을 되찾은 방식은 등가 교환의 형식이었지만,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새로 출범한 법에 따라 독일을 제외한 다른 국가나 개인에게 반환하기는 처음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 p.152
모나리자, 이 작품이 전쟁 기간에 정확히 어디에 있었고, 어떻게 돌아왔는지와 관련한 이야기는 서로 모순될뿐더러 충돌한다. 전문가들은 전쟁에서 피난하던 이 작품은 1942년 몽토방에서 사라졌다고 추측한다. 루브르에서 출발해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닌 모나리자는 고품질의 복제품, 즉 가짜이며, 작품이 이동할 때마다 행방을 알린 암호는 사실 나치 독일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명작 약탈에 혈안이 된 나치는 모나리자를 끊임없이 노릴 터이니 가짜 모나리자를 내주어 추적을 차단하려던 고도의 계산이었다는 것이다. 조자르의 의도대로 1942년에 가짜 모나리자가 나치에 강탈당했고, 이것이 결국 알타우제 소금 광산으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 p.163
독일 언론은 이들을 ‘마지막 전쟁 포로’라고 일컫는다. 그 포로는 독일을 대표하는 괴테, 루터, 베토벤, 바흐, 실러 등 철학자, 음악가, 시인, 소설가 등이다. 이들의 수기 원고와 악보 등 50만 건 이상을 폴란드가 소장하면서 독일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독일 국가(國歌)와 유명 저작물의 초판본 등 독일 문화와 지성의 정수로, 가히 국보급이다. 폴란드는 이런 것들이 베를린에서 온 것이라 하여 ‘베를링카 컬렉션’이라 한다. 전쟁이 끝나고 1945년 8월 포츠담 협정으로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을 정한 ‘오데르-나이세 선’에 따라 그뤼사우가 포함된 독일 동부지역이 폴란드 땅으로 결정되었다. 전후 이곳에 있던 컬렉션을 비밀리에 고스란히 확보한 폴란드 정부는 양도 어마어마하지만, 독일의 대표적 고급 문화유산이었기에 깜짝 놀랐다.
--- p.182~183
폴란드가 반환에 소극적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에 여전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은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배상은 현금이 아니라 물질과 기반 시설, 식량의 형태로 소련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그러나 소련의 실질적인 배상은 없었다. 아르카디우스 물라르치크 폴란드 집권당 의원이자 의회 배상금 위원장은 “유대인은 보상받았지만, 나이 든 폴란드 국민은 단 1유로도 보상받지 못했다. 이런 것에 매우 신경이 날카롭고, 분노한다”라고 주장한다. 전후 배상과 관련해 폴란드 국민의 이런 정서가 약탈 문화재와 예술품 회복을 더욱 복잡하게 한다.
--- p.208~209
전쟁 후,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수많은 작품이 귀환했다. 전쟁 전의 소유자와 그 후손들은 비록 전쟁 기간에 작품 매각 대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받았다 해도 네덜란드 정부에 작품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컬렉션은 강요로 판매한 것이며, 국가가 압류하여 가지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네덜란드 정부가 예술품을 연합군으로부터 되돌려받는 과정에서 단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음에도 나치와 그 대리인들이 작품들을 사들이면서 지불한 대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요구한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의 ‘보관 비용’이라 하기에는 너무 지나치다고 그 후손들은 지적한다.
--- p.222
‘문화재 보고(寶庫)’ 이집트 같은 사하라 사막 북쪽 아프리카 국가를 제외한 서브 사하라 유물 90퍼센트 이상이 유럽 박물관에 있다. 유럽의 아프리카에 대한 문화재 수탈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전리품, 절도, 약 탈 그리고 대다수는 진정한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의 매입 등이 동원되었다. 그 현황을 보면 벨기에의 ‘아프리카 중앙박물관’이 18만 점을 소장하고 있어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박물관 컬렉션의 85퍼센트 이상이 중앙아프리카의 과거 식민지 콩고공화국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박물관의 소장품 일부는 선교사들이 가져왔고, 또 일부는 군사 작전과 약탈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 p.244
영국 인권 변호사인 로버트슨은 “식민시대의 야만성에 대해 거의 매주 사과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과는 싸구려”이고 “진정한 유일의 사과는 약탈품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유럽 박물관을 강하게 다그친다. 그는 유럽 박물관들은 폭력적인 식민지 상황을 진지하게 마주 보려 하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박물관들은 약탈한 유물에 대해 ‘절반의 진실’과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설명을 붙여둔다고 비판한다. ‘사부아-사르 보고서’의 공동 저자 베네딕트 사부아는 “유럽 박물관은 이런 유물들이 처음 있었던 곳에서 어떻게 획득했는지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더한다.
--- p.266
마추픽추를 누가 처음 발견했고 그 많은 유물을 가져갔는지는 여전히 어둠 속에 가려 있지만, 확실한 것은 위대한 마추픽추를 건설한 이들의 후손들은 유적지를 보러 오는 여행객들의 짐꾼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추픽추의 잉카 유물 반환은 끝나지 않았다. 그 유물들을 되찾지 못하면 과거를 온전하게 복원할 수 없는 마추픽추는 반쯤은 ‘잃어버린 도시’로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다.
--- p.297
고대의 국가 영역이 현재의 국경선과 일치하지 않지만, 중국이 자국 영토 내에 있었던 과거의 역사를 모조리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고 사실을 왜곡하고 혼란을 부추기는 연구를 하는 것이 동북공정이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일어날 수 있는 영토분쟁 소지를 미리 방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초창기 발해 연구를 주도한 것은 동해를 사이에 둔 일본이다. 일본은 만주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운 뒤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에 있었던 발해 수도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 등을 발굴하면서 연구를 주도했다.
--- p.336~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