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언제나 그대 등 뒤에서 불기를. 아플 때는 내가 보이지 않아요. 그곳에 언제나 당신이 있어요. 하늘에는 섟근 별이 소나기처럼 내려요. 당신의 여름은 어때요?
『바람이 언제나 그대 등 뒤에서 불기를』은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속에서 강남 한복판에서 청년 고독사를 목격한 저자가 제대로 소통하자며 써낸 『말주변이 없어도 대화 잘하는 법』의 5년 후 전언이다. 2016년 『말주변이 없어도 대화 잘하는 법』은 들불처럼 번지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소통, 나라다운 나라, 상식이 통하는 나라’를 외치며 이제 우리도 더 자유로울 수 있을지 기대가 싹텄던 5년이었다. 하지만 ‘나라다움’, ‘정의’, ‘나다움’이 권력과 인간의 욕망 앞에 산산 조각나는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말았다.
5년 후 오늘 우리는 또다시 방향을 잃었고 방향을 찾기 위해 방황 중이다. 우리의 바늘은 또다시 혹독하게 요동치며 방향을 찾아야 할 시대를 살고 있다. ‘바람이 언제나 그대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 항상 따뜻한 햇살이 비추길’은 아일랜드 켈트족의 기도문으로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가 전한 2019년 마지막 브리핑이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떨리는 지남철, 신영복』. 멈추지 말고 흔들리는 것은 정확한 방향을 찾으려는 고뇌의 몸짓이다. 두려운 듯 떨며 움직여 온 우리. 끝없이 움직이며 나아가시길…’이라며 손석희 앵커는 조용히 퇴장했다. 2019년 그의 조용한 퇴장 이후 안으로는 코로나 바이러스, 밖으로는 한층 증폭된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손석희 앵커의 차분한 퇴장과 응원 글이 무색하게 세상은 다시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세상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가 뉴스룸에서 다룬 현대사의 비극, 한일관계, MB 정부의 정책, 시민의 삶, 노동, 국정농단, 정당정치, 인물, 재난 위기, 사회 부조리, 촛불 정부, 검찰·법원 개혁, 남북관계, 우주와 종교, 저널리즘, 어디 그뿐인가? 바늘 끝은 다시 방향을 찾기 위해 요동친다. 흔들리는 바늘은 ‘고뇌의 온도’이자 ‘팽이의 온도’로 저자의 글 속에서 살아났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5년 후 저자가 내린 결론은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 ‘설렘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바람이 언제나 그대 등 뒤에서 불기를』에는 상담전문가로, 국제공인 동기면담 훈련가로, 작가로, ‘안나의 집’(노숙인 거주시설, 대표 김하종) 봉사자로, 이 시대 가장 핫한 5064(50~64세 신중년)에 속한 평범한 중년 남성으로 좌충우돌하며 살아온 저자의 ‘웃음 속 눈물, 낭만’과 ‘라이브 인생’이 그대로 실려 있다. 저자는 평생 ‘작가’로 살아왔다고 한다. 아니, 작가인 척(?)하고 살아왔다는 게 맞을 것이다. 배를 탈 때도, 엄마가 죽었을 때도, 이종사촌 모임 때도, 회사에 다닐 때도, 회식할 때도 팽이의 영혼을 장착하고 다녔다. 세상의 고뇌와 기쁨, 슬픔, 낭만을 염탐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착각(?)하며 몸으로 살아간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영혼을 뒤집어쓰고 작가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구경꾼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구경기록이 넘치면 책으로 쏟아낸다. 자신을 바라보는 구경꾼을 보는 재미 때문인지 독자는 저자의 다음 행보와 글을 항상 기다린다.
팽이는 그를 지탱해주는 ‘영혼의 안내자’다. ‘팽이의 온도’로 지칭되는 그의 사계절은 0℃부터 55℃까지 올라있다(사실 185℃까지 올랐는데 출간을 위해 추렸다). 책에서는 사계절을 월별로 구분했다. 팽이의 사계는 겨울에서 시작해 가을에서 멈춘다. 팽이의 온도 0℃, 삶에 지친 한 남자가 자목련이 핀 오두막에 도착해 인생의 답을 묻는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노인은 호통치며 ‘자기’를 제대로 돌아볼 것을 전하고 포행을 떠난다.
겨울, 방황 팽이의 온도(0∼9℃, 12~2월)
‘팽이는 다시 봄을 맞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 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간다. 1℃ ‘대설주의보’부터 9℃ ‘내게 낭만은 조선이다’까지 겨울을 견뎌내는 팽이의 시린 낭만이 가득하다. ‘눈보라 속에서 추억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 막막한 그리움이 그들에게 닿을까? 백색 혼백들은 안녕할까? 그 새끼 쥐들은 살아남았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미와 아비의 생명력이 멈추는 법은 없으니까.’
--- p.31
파종기, 돌아보고 만나기, 팽이의 온도 10~22℃(3~4월)
팽이는 방황의 겨울을 지나 아버지, 이모, 노숙인 친구, 동료 등과의 추억과 그리움을 떠올리며 봄맞이 준비를 한다. 10℃ ‘이모라고 쓰고 들꽃이라고 읽는다’부터 22℃ ‘배꼽이 뜨거워 눈물이 났다’까지 삶의 기대와 그리움, 사물과 이웃에 대한 따뜻하고 섬세한 애정이 다가온다.
‘용래는 맨날 동네 목간통만 다녀서 온천욕을 몰러. 뜨거운 온천물을 개구리처럼 튀어나오는데 그 불알이랑 그때 다 익었을 거여.’ 내가 본 아버지의 일생 중 가장 환하게 웃은 것은 그 얘기를 꺼낼 때였다. 용래는 둘째 이모부의 이름이다. 두 분이 만나면 오순도순 ‘형, 동생’하며 살가웠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이모들과 ‘성, 동상’이라고 부르며 밤새 남편 이야기를 했는데 절반은 흉이고 절반은 자랑이었다. 특히 첫째, 둘째 동서가 서로 친했다.’
--- p.79
봄, 성찰 팽이의 온도 23~28℃(5월)
팽이는 먼 들판을 바라보며 대지의 온기를 느낀다. 긴 겨울을 건너왔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저 대지의 온기를 몰고 오는 섭리를 거역할 수 없다. 4월에 이별하면 갈 곳이 없으니 5월로 가자. 23℃ ‘더딘 봄, 영혼의 거처’부터 28℃ ‘콩죽을 저으며’까지. 팽이에게 봄은 5월 한 달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많이 잃었지만 봄 들판에 생명의 뿌리를 내리며 그립고 서글픈 바람이 대지를 적시기 때문이다. ‘벚꽃 엔딩’, ‘사춘기’, ‘수국의 정원’, ‘투표 행렬에 울다’, ‘콩죽을 저으며’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을 맞은 사실을 기꺼워하며 방황의 겨울을 지나 자신을 돌아보고 만났던 시간을 성찰한다. 삶의 증표인 꽃잎을 보며 콩죽을 젓는 어머니를 보며 가슴 뭉클한 팽이의 온도를 보여준다.
‘어머니는 땅콩을 나중에 갈아 넣은 게 마음에 걸린다. ‘흰콩을 갈 때 함께 갈았어야 했는데… 그걸 까먹었네. 함께 갈아 넣었어야 했는데….’라며 다시 이마를 짚으신다. 죽이 식는 동안 어머니는 달래를 캐러 가셨다. 해가 저물고 손톱 달이… 내 손톱의 투명한 끝선보다 가늘다. 내 몫의 동기로 살아가는 물길에 어머니가 계시고 어머니의 물길에 사람이 흐른다.’
--- p.149
여름, 지혜 팽이의 온도 29~39℃(6~8월)
팽이가 더 이상 채찍 없이 스스로 돌아가며 날아오르는 계절이다. 비로소 팽이가 자유로워지는 계절이다. 팽이는 이제 채찍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몸으로 살아가며 생을 만끽한다. 팽이의 온도 29℃ ‘자목련이 7월에 피다니’부터 팽이의 온도 39℃ ‘편백나무의 영혼’까지. 깊은 자기성찰 이후 찾아오는 ‘행동하는 지혜’를 터득한 팽이는 이제 더 자유롭게 살아간다. ‘아플 때는 내가 보이지 않아요. 그곳에 언제나 당신이 있어요. 하늘에는 섟근 별이 소나기처럼 내려요. 당신의 여름은 어때요?’라고 물으며 여름을 살아간다.
‘우리는 흑산도에서 조용히 각자 만나고 돌아왔다. 어쩌면 일생에 한 번밖에 없을 순간들을…. 2019년 6월 흑산도에는 낮달이 휘영청 밝았고 섟근 별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 p.166
가을, 비워냄 팽이의 온도 40~55℃(9~11월)
팽이의 온도 40℃ ‘포자가 머무는 자리’부터 55℃ ‘비워낼 용기’까지 조선의 낭만에서 가을의 낭만까지 설렘이 멈추지 않던 팽이가 ‘참자기’를 찾아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흐읍!’ 호흡을 들이마시고 숨을 참으며 신도시로 잠수한다. 발차기하듯 엑셀러레이터를 밟고 인공도시 한가운데로 진입한다. (중략) 이제 어디서 두 번째 숨을 쉴지 몰라 겨우 한 줌 숨을 남긴 채 주차한다. ‘투뿔’ 고깃집 상호가 화려한 필체로 뻗은 건물 아래로 그제 거세당한 고양이가 천천히 지나간다. 얼룩 고양이는 장미잎이 떨어진 담장 밑을 지나가며 이쪽을 노려본다. 저 눈빛…. 저 생명체의 생각을 가만히 훔쳐본다. 바람이 언제나 등 뒤에서 불기를.’
거울 속에는 ‘자기’를 돌보지 않고 세상 욕망에 흔들리던 병든 사내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탐욕스러운 모습이다. 사내는 눈물이 가득 고인 토기 잔을 들어 거울에 던진다. 거울과 함께 토기 잔이 산산이 부서진다. 노인은 잔과 거울을 맨발로 즈려 밟으며 말한다. ‘잔이 흙으로 돌아가 사라졌군. 으흠, 좋구먼.’
---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