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려면 느껴야 한다
1980년대만 해도 학자들이 생각하는 자아는 이성과 관련된 것에 한정되었다. ‘인지 혁명’이 일어나던 그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리의 두뇌를 컴퓨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인간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비유하였다. 컴퓨터만 이해하면 우리 인간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컴퓨터에 두뇌를 비유하면서 우리는 이성적 자아상을 더욱 키웠다. 따지고 보면 컴퓨터의 특징은 그것의 심오한 감정이나 감각, 직관이나 존재하지 않는 그 밖의 비이성적인 힘들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의 것으로 행하는 고도로 정교하고 논리적인 작업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자아 속으로 밀고 들어갈 확실한 도구들이 하나둘 선을 보인 것이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의 ‘하드디스크’를 직접 볼 수 있는 장치들이 개발되었다. MRI 같은 두뇌 스캐너를 이용해서 인간의 두뇌가 작업하는 광경을 밀리미터 단위로 정밀하게 볼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학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모든 생각, 모든 인식, 모든 기억은 실질적으로 감정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두뇌 차원에서 사고와 인식과 기억 ― ‘인지’라고 부르는 것 ― 은 감정과 전혀 분리될 수가 없다. 이제 인간을 컴퓨터에 비유하기는 쉽지 않다. 인지 혁명이 ‘정서 혁명’에게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생각하려면 느껴야 한다! --- p.18~19
더 많은 분석이 더 나은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
1990년대 초 미국 심리학자 팀 윌슨은 자신이 가르치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다섯 개의 포스터를 보여주고 이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한쪽의 학생들에게는 선택을 하기 전에 각 포스터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짧게 적으라고 했고 다른 쪽 학생들에게는 포스터를 즉흥적으로 고르라고 했다. 그 학기가 끝날 무렵 심리학자는 학생들에게 각자가 고른 포스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심사숙고 끝에 고른 쪽은 자신의 선택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한 반면, 즉흥적으로 고른 쪽은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 집 벽에 붙여두었다고 대답한 비율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정말 이상하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바라던 상황이 아닐 것이다. 많은 학자들 역시 말도 안 되는 결과라고 하면서 믿으려 하지 않았다. (중략)
그래서 실험을 다시 반복했다. 그러나 선택의 대상을 잼으로 바꾸건 대학의 강의로 바꾸건 피부 크림으로 바꾸건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더 많은 분석이 반드시 더 나은 선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많은 경우에서 고민을 적게 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더 나은 결과가 나왔다. (중략) 이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멍청한 것일까? 한마디로 대답하면, 그렇다. 멍청하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학문적으로 정확히 표현하면, 의식적 이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직관 역시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 둘의 장점과 단점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p.44~46
가슴에게는 머리가 모르는 정보가 많다
1980년대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폴게티 박물관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미술 거래상이 박물관 측에 그리스 조각상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 조각은 키가 족히 2미터는 되는 벌거벗은 청년이 왼쪽 발을 살짝 앞으로 내민 쿠로스상이었다. 이 조각상에 대해 거래상은 1,0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을 요구했다. 당연히 박물관 측은 작품의 진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자현미경, 질량 분석기, 방사선 회절 조사, 방사선 형광 조사 등 첨단 장비들을 이용해 대리석상 구석구석을 살폈다. 결과는 확실했다. 작품은 진품이었다. (중략) 진품 여부를 조사한 끝에 쿠로스상을 박물관으로 들여오기로 정했다. 그런데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직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임 관장이 조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 순간 그가 처음으로 떠올린 단어는 ‘새것’이었다. 그들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추가 조사 결과 조각상은 로마의 위조 공장에서 만든 위조품이었다. (중략) 결국 1년여에 걸친 과학자들의 분석이 아무 소용없었던 셈이다. 반면 몇 명의 미술 전문가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그들이 이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감각과 직관, 직감이었다. --- p.52~53
당신의 욕망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 심리학자들은 무의식에 접근하는 방법을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실험을 통해 이 사진 테스트를 개발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최대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무의식의 욕망에 다가가는 테스트이다. 이런 욕망을 얼마나 마음껏 발산하느냐는 각자가 알아서 할 노릇이지만 욕망 그 자체는 세 가지 기본 범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성공’, ‘애정’, ‘권력’이다. 당신의 무의식이 성공, 애정, 권력의 유형 중 어느 쪽을 향하는지를 알기 위해선 조금 전 당신이 적은 이야기를 분석해보아야 한다.
성공지향적인 사람들은 어떤 일을 그 일 자체를 위해 완수해내고자 한다. 따라서 스스로 목표를 세울 수 있는 그런 직업을 선호한다. 명령이나 지시는 딱 질색이라고 느낀다.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알아내고 싶어 한다. (중략) 애정을 지향하는 인간은 타인과 친밀한 관계가 될 때 행복을 느낀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특히 자주 눈을 맞추고 상대에게 외면당했을 때 큰 상처를 받는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서로를 잘 모르는 대규모 집단에는 별 매력을 못 느낀다. 둘이 있을 때, 혹은 개인적인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소집단에서 훨씬 신이 나고 행복하다. (중략) 마지막 세 번째 범주는 권력이다. 권력이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똑같이 최고가 되려고 해도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최고가 되려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성공지향적 인간, 후자는 권력 지향적 인간이다. --- p.78~80
중요한 결정일수록 이성을 믿지 마라
우리의 자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차원으로 나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언어 자아와 경험 자아이다. 언어 자아는 나를 말하는 자아이다. 자신을 의식하고 우리 사회가 바라는 바를 지향한다. 우리는 언어 자아를 이용해 ‘변호사가 될 거야’라거나 ‘커리어우먼이 될 거야’라는 식으로 의식적 목표를 정한다. 그러나 이런 목표가 반드시 내면의 욕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욕구를 알기 위해서는 사진 테스트를 하면 좋다. 이를 이용하면 우리 마음에 숨은 욕구를 조금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진 테스트는 가장 잘 맞는 직업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와 더불어 두 가지 전략이 더 추가되어야 한다. 첫째는 자기관찰이다.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에게 무턱대고 물을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무의식적 호불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만하다. 내 업무도 아니고 무슨 보상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참여하는 활동이 있는가? 어떤 업무, 어떤 활동을 할 때 나는 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가? (중략)
둘째는 백일몽이다. 무의식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은 앞서 살펴본 올리버 슐트하이스의 마지막 실험이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자아를 향해 떠나는 상상의 여행이다. 지나치게 고민하지 말고 꿈을 꾸어야 한다. 너무 철저하게 고민하거나 양심적으로 따지면 아이러니하게도 언어 자아만 활성화될 뿐 내면의 욕구에는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한다. 내면의 욕구에 다가가기 위해선 고민보다 명상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흔히 우리는 백일몽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목표일수록 의식적 이성의 말만 들어서는 안 된다. --- p.113~114
효율적이면 창의적일 수 없다
효율성이야말로 이성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의식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세상으로 다가가면 우리의 탐색망에 맞지 않는 것들은 하나도 보지 못한다. 영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먼이 행한 작은 실험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신문을 주면서 신문에 사진이 몇 장이나 실려 있는지 세어보라고 했다. 대부분은 2분 정도가 걸렸지만 혹시 실수했을까 봐 신문을 한 번 더 살피느라 시간이 더 걸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누구도 심리학자가 신문 2면에 대문자로 크게 집어넣어둔 이 제목은 보지 못했다. ‘사진을 그만 세세요. 이 신문에 실린 사진은 43장입니다.’ (중략) 그런데도 모두들 사진의 개수를 세느라 여념이 없어서 그 문장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이성은 오직 사진만을 보았던 것이다. 이성의 계산은 앞서 소음 실험에서 보았듯 사소해 보이던 것이 갑자기 중요한 것으로 밝혀질 때 허사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효율적인 방법을 택한다. 하루 종일 마음을 열고 관망을 하고 모든 자극을 일일이 점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창의력에게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창의적이라는 말은 의식적 이성이 효율적인 방법을 포기한다는 뜻이며, 빠른 해결책을 택하려는 성향을 억누른다는 뜻이다. 당장 문제를 풀려고 드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개방적 자세로 그 문제 안으로 ‘침투’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위험하다. 에너지와 시간만 낭비하고 결국 아무 결실도 얻지 못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은 목표나 최종 결과에만 관심을 보일 때가 아니라 ‘실수’를 저지르고 목표로 가는 과정을 사랑할 때 가장 큰 기회를 얻는다. 그림이나 음악 작품, 책이나 과학 연구의 결과에만, 다시 말해 ‘결과물’이나 ‘해결책’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작곡하고 쓰고 연구하는 ‘과정’ 그 자체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아니, 전자보다 후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p.193~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