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이 아니에요.”
뮤리엘은 고개를 들어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건 아줌마 이야기일 뿐이잖아요. 이건 내 이야기란 말이에요.”
시빌은 자신의 손바닥에 박힌 모래들을 털었다.
“나는 그날 똑똑히 봤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바나나피시를 본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장희원,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중에서
“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나요?”
“막 쓰면 돼요.”
진지한 얼굴로 물어오는 학생들에게 농담 같은 진담을 알사탕처럼 뿌리면서도 어느 피조물의 정체를 꿰뚫어 보려 눈동자에 힘을 줬지. (……) 상상력을 발휘해 보렴. 허공을 내달리듯 자유분방한 무중력 상상력. 중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러니까 지구인임이 분명한 후배 작가에게 돌아간 찬사는 너의 것이어야 마땅하니.
---「김경욱, 너는 지구에 글 쓰러 오지 않았다」중에서
“그래 봤자, 너는 나의…… 챗GPT에 불과하다.”
그 말에 이상이 긴 날개로 김해경을 휘감았다.
“일단 파파의 수다스러운 말과 귀찮은 몸은 필요 없고 정신만 있으면 되니, 온몸을 두들겨 납작하게 만들어 드리지요.”
이상은 김해경을 허공으로 내던졌다.
김해경은 허공으로 솟았다가 추락하며 처음에는 두려움에 빠졌지만은, 잠시 후 두려움은 안개가 흩어지듯 희미해졌다. (……) 그는 문득 지금의 이상이 아닌 그가 상상하였던 그런 이상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생강, 종로 거리의 아해들」중에서
인간은 삶을 영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삶을 ‘작위’합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나보다 먼저 그 사실을 간파한 사람입니다. 굳이 그의 정체를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이만한 설명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을 겁니다. 다만 편의상 널리 알려진 그의 필명 대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실명으로 언급하겠습니다. 修治. 소리 나는 그대로 읽으면 수치, 그의 진짜 정체는 수치입니다.
---「황현진, 인간 애호」중에서
어쨌거나, 플루토가 시작이었다. 비가 내렸던 그 초가을 날. 서울 변두리 원룸촌에 19세기 영국 분위기로 비가 내리던 그날. 에드거 앨런 포는 미국인이라고 내가 지적했던 그날. 잭 더 리퍼는 오스카 와일드가 아니라 루이스 캐럴이 라고 정정했던 그날.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나. 오스카 와일드나 루이스 캐럴이나. 후…… 잭 더 리퍼는 누구인지 모른다. 영원히.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아무리 알아내려고 애써도.
---「위수정, 플루토, 너의 검은 고양이」중에서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줄리아는 자신이 소설 속 캐릭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진짜 인간이 아니라 인도 벵골에서 태어난 영국인 관리의 아들이 쓴 소설 속 인물, 머릿속에서 떠올려 활자로 옮겨적어 놓은 개념, 가상의 캐릭터였다.
---「정지돈, 이중사고」중에서
“내 뒷조사했지?”
“뒷조사라기보단…… 그냥 신기해서…….”
“그게 뒷조사야. 하여간 핑계가 많은 족속이야.”
그는 그러면서 짧게 욕을 하기도 했다.
“그 인간도 내 뒷조사했어.”
나는 곁눈질로, 겨우 간신히 서만기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나이 탓인가? 그도 아니면 산 사람이 아닌 탓일까? 그는 소설 속 서만기처럼 그렇게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다. 코가 낮고 턱은 두툼했다.
“그래도…… 소설에는 좋은 분으로 나오세요.”
---「이기호, 서만기 덴탈 클리닉」중에서
설마 아직도 미국인이라는 환상에 빠져 계신 거예요? 제발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보자고요. 바로 우리가 미국인이에요. 이게 미국이에요. 로빈은 무엇하고도 싸우고 있지 않아요. 싸움은 할머니가 하고 계시네요. 가엽게도. 왜 늙은이들은 이유와 의미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알기로 사실 그딴 건 없어요. 세상에 없는 이유와 의미를 자꾸 찾다 보니 결국 그걸 만들어내고 마는 거예요.
---「우다영, 리타의 회전 목마」중에서
명백한 시간과 목적지처럼
앞모습만으로 충분한 진실의 등 뒤에서
우연을 가장해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는 배신자들
슬픔의 초인종 앞에서조차
번지수를 잘못 찾은 방문객을 흉내낸다
경제적 손실과 잘못 전달된 약도 따위를
염려하면서
정말로 대문을 열지도 모르는
집주인을 두려워하면서
등에 짊어진 고독을 끝끝내 내비치지 않는
인간 애호가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입구도 출구도 사라진
문맥 속 어둠을 헤집고 다닌다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피나는 무르팍을 감춘 채
울고 웃는 육체를 굴리며 피 맛의 유래 따위를 읊어 대는
감성의 거짓말쟁이들
그러나 그들을 보았다는 말 역시 거짓말
문학창작촌에서 늦잠을 자고 일어난 게으름뱅이들은
배신자가 아니다 그저 소개를 위한 구실일 뿐
앞모습만으로 충분한 이 도시에서
뒷모습의 비밀을 상상하던 그들은 여전히
뒷골목 낙서처럼 적혀 있다
갈팡질팡하던 어느 묘비명의 결말이 그러하듯이
원작을 마중 나온 작중인물이 그러하듯이
은하계 너머 외딴 창작실에 드러누운 조물주같이
골치 아픈 뒷정리를 거느린 직전의 사건을
간발의 차이로 끼워 넣는다
〈기혁 시인·리메로북스 노조위원장〉
---「소설가: 에필로그를 대신하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