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다가갈 때 최고의 난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유일신의 시각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는 다신의 세계다. 개별 신의 영역이 구획되어 있되 서로 연결되어서 한 신을 다른 신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오히려 신들의 상호 역동을 들여다봐야 이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 신들의 세계에서는 각자의 고유한 영역과 힘을 철저히 존중한다. 어느 신도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고, 각기 온전하다. 저마다 강점과 약점, 밝음과 어둠이 공존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독특함 덕분에 개성도, 색채도 선명하고 다채롭다. 이 다름 사이의 조화가 올림포스의 이상이자 그리스 신화의 본질이다.
--- pp.25~26
운명이 어머니와 딸 사이를 찢어놓았다. 그런데 이 단절은 어머니라는 존재의 운명이기도 하다. 이(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화처럼 잔인하게 찢기느냐, 덜 파국적으로 갈라서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출산부터 그러하다. 한 존재는 탯줄을 잘라야만 탄생한다. 막 세상에 태어나려는 아이도, 이를 견뎌내는 어머니도 혹독한 산통을 치른다. 사춘기가 시작되면 다시 심리적 탯줄을 자른다. 혼인이야말로 또 다른 탯줄 자르기다. 아이가 자기 가정을 꾸리면, 어머니는 빈 둥지에 남는다. 한 존재의 성장이란 되풀이되는 독립의 역사이고, 이때의 분리는 어머니와 가정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다.
--- p.32
페르세포네에게 하데스와의 만남은 데메테르 여신이 생각하듯 한시 바삐 잊고 싶은 ‘악몽’만이 아닐 수 있다. 두렵고 놀랐지만, 더 큰 운명의 수레바퀴가 자기 삶을 굴리고 있다는 직관이 생겼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하데스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페르세포네는 다른 인물이다. 엄마 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모험의 세계가 있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엄마의 어여쁜 딸로 살아가는 삶은 이미 충분히 흥미롭지 않다. 페르세포네의 호기심은 더 커다란 미지를 향해 확장된다.
--- p.47
아테나의 여성성은 무엇보다 ‘아버지의 딸’이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여신은 가부장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버지 꿈의 체현이다. 지적이고 강인하고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나고 독립적이고 수려하다. 요즘 말하는 알파 걸의 원조인 듯하다. 자연히 여신은 아버지가 구축한 시스템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남신들과 남성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협력을 잘한다.
--- pp.62~63
아테나는 아버지의 딸이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관계를 되짚어봄으로써 여성으로서의 뿌리를 찾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다시금 조명해보자. 그러려면 몸과 땅으로 이어지는 어머니 세계와 그 가치에 대한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고전학자 제인 엘런 해리슨은 자신이 태어난 땅을 망각한 여신은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강변한 바 있는데, 자신을 남성 세계와 동일시해온 여성들이 삶의 후반부에 마주하게 되는 미완의 그림자는 상당히 다루기 어려운 문제다.
--- p.94
혼인으로 자신의 결핍이 채워지고 자기 삶이 온전해지리라 꿈꾸는 헤라다. 이런 헤라의 간절함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지 않을 여인이 지금 세상에 있을지 모르겠다. 본래 혼인 서약은 각자가 그리는 낙원의 약속이 아니라 준엄한 시련의 언약이다. 한 개인의 성장과 발달을 위해서 각자 아직은 풀지 못한 상처를 다룰 새로운 장이 펼쳐졌으니 감사할 줄 안다면 다행이지만, 대개는 오랜 세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서야 이 깨달음에 다다른다. 헤라로서는 삶을 온전하게 만들어주지 않는 제우스에게 화만 날 것이다. 헤라가 품은 화와 소유욕의 본질은 제우스가 절대 자기 것이 되지 않는 데 대한 분노다.
--- pp.126~127
고향으로 돌아가 고독한 시간을 보낸 헤라가 다시 제우스에게 돌아온다. 키타이론산에서의 웃음과 화해는 단순히 둘이 재결합한 게 아니라 둘 모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헤라의 변화를 가늠해보자면, 부부 관계라 해도 본질적으로는 홀로임을 받아들이면서 고독 속에서 진정한 관계를 이해한 것이 아닐지? 상대를 통해 기대를 채우려는 자기애적 욕구를 넘어서서 자신의 갈망과 바람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가는 것, 자신의 상처가 결국 자신의 정체성임을 알고 보듬는 것, 결국 서로 얽히고설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홀로일 수 있는 사람만이 깊이 함께일 수 있음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심리학적 혼인을 이해하는 것이리라.
--- p.140
현대 문명은 야생의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는 것을 발전이라 믿으며 구축되었다. 그러니 이 편치 않은 마음은 마땅한 결과일 법한데, 인류가 언제나 이런 태도를 고수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도 기억하자. 한때 가장 찬란한 문명이 꽃피었던 그리스다. 야생에 대한 그리스인의 이데올로기는 현대인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이들은 이 자리를 인식했고 존중했고 신성시했다. 다면적인 인간 정신의 르네상스에 야생이 주요한 한 영역이었고, 이 자리가 바로 아르테미스 여신의 홈그라운드다.
--- p.150
야성은 여성성의 주요한 측면이다. 주류 문화도, 이데올로기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일상의 조련도 결코 훼손할 수 없는 강하고 두렵고 아름다운 생명 본연의 힘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자는’으로 시작되는 말들은 ‘길들임’과 ‘순화’, 그래서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한 재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모르게 상처받고 죽어간 야성은 내면에서 어떤 신음 소리를 내고 있을까? 올가미에 걸리고 우리에 갇힌 야생의 그림자는 어떠할까?
--- pp.173~174
만일 삶에서 심미적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떠할까? 내게 펼쳐지는 사건이, 누군가와의 만남이 가슴에 가닿지 않은 채 피상에 머문다. 심미감의 장기인 심장과의 접촉 상실, 이런 때 우울이 지배한다. 매사 시들해지고 따분하다. 점차 둔감해지다가 무감각해지는데, 마치 심장이 마취된 듯 떨림과 울림과 감동이 전해지지를 않는다. 이 상황이라면 무엇보다 아프로디테와의 관계를 살필 때다. 내 삶에 아름다움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는지? 나와 내 공간의 아름다움을 위해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지? 아프로디테를 존중하지 않는 환경은 추하다. 추한 환경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감각을 둔하게 하여 우리를 우울로 빠뜨린다. 이러한 우울의 해독제는 단연 심미감을 되찾는 것이다.
--- p.196
지구, 집, 몸에는 중심이 있다. 중심은 움직이지 않으며, 에너지가 중심을 향해 움직인다. 집의 중심인 여신 헤스티아는 집을 떠나는 법이 없다. 그 대신 우리가 여신에게로 향하는데, 늘 한자리에서 한결같기에 안정감을 준다. 헤스티아는 화로의 불이다. 가족이 따뜻하게 모여드는 이 자리는 편하고 안전하다. 온기에 얼은 몸이 녹듯, 바깥에서의 만남이나 일에서 오는 긴장이 누그러진다. 따스함이 스며들어 몸이 늘어지고 마음도 풀어진다.
--- p.240
헤스티아의 다리는 반듯하고 곧아서 여신은 마치 기둥 같다. 발이 땅에 고정된 듯 미동도 않는다. 반면 헤르메스는 똑바로 서 있는 법이 없다. 항상 기우뚱한 자세로, 발끝을 들고 어디로든 튈 준비가 되어 있다. 한쪽 신발에 날개까지 달렸으니 땅보다는 공기와 더 친해 보인다. (……) 헤스티아는 집 안에 머문다. 이방인의 침입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한다. 헤르메스는 늘 새롭고 변화하지만, 헤스티아는 영속성과 한결같음이 그녀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안팎을 상호 배타적인 단절로 보기보다 연속적 흐름으로 상상해보자. 우리네 일상이 그러하다. 집에서 출발해서 일터로 나가고 외부 활동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몸이든, 공간이든 안에서 바깥으로, 바깥에서 다시 안으로 도돌이표처럼 이어진다.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외부 활동, 즉 내면세계와 가시적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 삶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헤스티아와 헤르메스가 순환하는 양면성을 보인다.
--- pp.251~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