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모범적이거나 엘리트 장교도 아니었고, 특수임무를 맡거나 비상시에 크게 활약한 경험도 없다. 하지만 여군으로서 차별에 맞서고, 또 억울하게 군사 법정에 서며 살아서는 군대 밖으로 못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담임선생님들은 다 남자였는데, 고1 때 담임선생님은 일찍부터 내게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라고 했다. 선생님은 JSA(남북 공동경비구역)에서 병사로 군 복무를 했었고, 선생님의 아버지가 군무원 생활을 오래 하셨기에 군인 딸인 내게 장교가 되기를 추천한 것이다.
“안 합니다.”
“다른 건 다 해도 군인은 안 합니다.”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을 목격한 그때 나도 행동을 해야겠다 싶었다. 딸 셋인 우리 집에서 누구 하나 군대에 가야 할 텐데 그게 나다 싶었다. 이제라도 부사관 시험을 봐야 하나? 학사장교는 대학 졸업반 때 지원할 수 있어서 너무 늦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이 되었다. 우리 학교에도 여성 학군단 후보생을 모집한다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붙었다.
오늘도 함께 근무하는 부대원들을 본다. 이들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자식이고 부모고 애인이다. 아니, 아빠의 말처럼 부대원이 내 가족이고 내 가족이 곧 부대원이다. 휴대폰에 가족들보다 부대원과 함께 찍은 사진이 더 많은 것을 보니 반쯤은 성공이 아닌가 싶다. 먼 훗날 지금을 돌아보았을 때 후회 없이 국가와 군인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의 흐뭇한 미소마저 닮아있는 붕어빵 부녀 군인으로 오래 지냈으면 좋겠다.
감봉, 보직해임, 진급 누락 등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다 받았다. 동기들보다 늦게 진급하고 늦게 전역했다. 제대하면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살아서만이라도 제대할 수 있겠나 생각했는데 이제는 하루하루 내일이 기다려진다. 그러니 얘기하고 싶다. 내 뜻대로 안 되는 많은 일을 흘려보내자고, 지나 보내자고. 그리고 살아있자고. 살아서 제대한 후에는 또 그 나름 가고 싶은 길이 보인다.
어떤 도전은 수십 년이 지나도 도전이다. 6·25전쟁부터 활약하여 그 역사가 70년이 넘은 여군에게도 그렇다. 2000년대가 되어서야 여군 장군이 배출되었고, 아직도 여군 최초 00대대장, 여군 최초 00함 함장처럼 끊임없이 ‘최초 여군’이 나온다. 많은 여군 선배들의 노력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래전에 나왔어야 할 ‘최초’가 앞으로도 남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여군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다른 많은 직업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선택과 상황에 의해 의무복무를 할 수도 있고, 직업군인이 될 수도 있다. 여성의 장점을 내세워 엄마, 누나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라거나 혹은 그 반대로 남군같이 하라는 말도 필요 없다. 아무도 남군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아빠, 오빠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총기 분해·결합을 배웠고, 실탄으로 사격도 해본 여자다. 그만큼 총의 위력을 피부로 느꼈기에 총기 소지가 허용된 국가는 여행하고 싶지 않다. 비유로라도 ‘지원사격’, ‘조준사격’ 같은 말은 안 쓰고 싶다. 백지영 노래 ‘총 맞은 것처럼’, 빅뱅 ‘뱅뱅뱅’의 가사도 끔찍하다.
어깨를 짓누르는 군장보다 더 날 힘들게 했던 건 책임감이다. 수많은 길 중에 이 길을 선택한 건 온전히 나라는 것, 아무도 군인이 되라고 등 떠밀지 않았다는 것.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친 시간이었는데도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다. 작은 몸에도 무거운 군장과 총을 메고, 종종걸음으로 멈추지 않고 걷고 걸어 여기까지 왔다.
지금도 대한민국 어디에서는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모두가 잠든 후에도 깨어 자신의 길을 찾는 사람, 다른 이를 인도하는 사람, 옆에서 묵묵히 함께 걸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전후방 각지에서 등불처럼 비추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편안히 잠들고 또 무사한 아침을 맞는다. 많은 일을 사람 대신 기계가 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밤을 새워 굳이 걸어가는 일은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의미이자 낭만이 아닐까 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나는 새벽별 같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 오래 그 자리에 있고 싶다.
현역으로 근무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여군이라 힘들지 않냐고. 그럼 나는 “여군이라 힘든 것보단 군인이라서 힘들죠”라거나 “회사원들 힘든 거랑 똑같죠”라고 대답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여군을 부대의 연예인처럼 상상하고, 여군이 하는 일은 쉽고 눈에 띄는 업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 군 생활이 시트콤 같거나 즐겁게만 보인다면 그건 내가 군 생활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고, 가볍게 웃을 수 있도록 풀어내기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군과 군인을 사랑하고 잠시나마 군인으로 복무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난 군 생활에 대한 한탄이나 원망, 후회보다는 다른 좋은 것들을 많이 남기고 싶다.
다만 군 생활의 목표로 ‘병과장(장군)’을 꿈꿨던 내가 ‘살아서 제대하기’도 불가능할 거라 느껴졌던 6년 4개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여군이 아니었다면 겪지 않고 고민하지 않았을 일이 많다. 행정 병과 장교로 복무했고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었던 내게도 이 정도였다. 모든 군인이 교육훈련과 업무에 관한 고민만 하게 되기를 빈다. 군인의 죽음은 전쟁에서만 있어야 한다.
여군이 훈련과정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너희는 여자가 아니라 군인이야!”라는 말이다. 어항 속의 물고기나 수면 아래 발을 동동거리는 백조라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남군에게 “너는 남자가 아니라 군인이야!” 하고 윽박지르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내게 엄마처럼 누나처럼 따뜻하고 섬세한 리더십을 발휘하라는 상관도 있었고, 또 어떤 상관은 매혹까지 하라고 했다.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군인인 동시에 엄마이자 누나까지…. 여군에게 바라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제 인생의 전우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군 생활을 한 것이 저의 큰 영광입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