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린영은 입양되어 자란 자매다.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린영의 친모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오고, 나는 린영과 함께 그녀를 만나러 간다. 버스 안에서 린영은 자신이 버려졌던 베이비박스에 다녀왔던 눈 오는 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친모를 만나고 온 린영은 비문증으로 보이는 것이 날파리가 아닌 눈송이라는 것과, 자신은 버려진 게 아니고 지켜진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 뒤로도 그녀는 늘 린영의 주변을 맴돌았다. 눈먼 물고기를 에워쌌던 물풀처럼. 그래서 기어이 물고기로 하여금 물풀의 숨을 기억해내게 했으리라.
린영이 내 품에 와락 안겼다. 나는 린영의 등을 도닥이며 마법에 걸린 눈송이에 대해 생각했다. 소르르 소르르 눈송이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어쩌면 내일이나 모레, 혹은 눈이 쏟아지는 어느 날 린영에게 말해줄 것이다. “괜찮아, 좀더 이렇게 있어도.”
--- 「물풀의 아이들」 중에서
다훈은 빨리 늙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데, 그 진행이 빨라져 이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꿈속에 찾아오는 코끼리 시누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자, 그러면 더 빨리 늙는다는 걸 알면서도 유치원 친구였던 지유를 만나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던 시절로 잠시 돌아간다. 마침내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다훈은 시누와 함께 대평원으로 탐험을 떠난다.
요정들이 나와 지유를 둘러쌌다. 나는 지유를 과자의 나라로 안내했다. 「꽃의 왈츠」가 흘러나오고 리듬에 맞춰 요정들이 춤을 추었다. 하늘 한 모서리가 열리더니 달빛이 지유에게 쏟아졌다. 나는 몸을 굽힌 채 손을 내밀었다. 지유의 손이 내 손에 닿는 순간,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리듬에 몸을 실었다. 지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간절히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 「코끼리의 방식」 중에서
은형은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눈길이 가던 진서에게 빠져든다. 진서는 백령도에서 살다가 인천으로 유학 왔는데, 동성 친구였던 민기의 고백에 혼란스러워하다가 도망쳐왔던 것. 그리고 진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심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서의 소개로 알게 된 은형과 민기는 진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털갈이’ 중인 진서를 이해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진서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냥 널 알고 싶었어.
순간의 갈피마다 담긴 진서의 마음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나를 지탱하게 해준 힘이었다. 진서가 지나온 물범의 시간도 그 어디쯤에 있지 않을까. 네가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멀리 아득한 심연에서 자맥질하는 진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 「물범의 시간」 중에서
나는 엄마와 함께 호숫가 별장에서 휴양 중이다. 나를 향해 있던 행운들이 줄줄이 낙하하는 것을 보는 느낌. 아빠가 떠나고, 사생대회에서는 상을 받지 못했고, 최근에는 남자 친구인 윤우와 다퉜다. 나는 카페와 별장에서 우연히 만난 ‘그 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그 애가 초대한 별들의 장소에서 별이라 불렀던 보육원 동생을 호수에 묻어야 했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나는 내 안에 들어온 별들로 인해 오래도록 내가 되어갈 것을 예감한다.
“별들이 네 안으로 들어가고 있어.”
나는 말했다.
“왠지 이젠 혼자가 아닌 것 같아. 별과 더불어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 애가 말했다.
그 애를 통과해 온 별들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느꼈다.
“별들의 장소에 초대해줘서 고마워.”
잊지 못할 거야,라고 나는 속으로 덧붙였다. 그래, 세월이 잊게 한다고 해도 별들은 기억해줄 거야,라고 그 애가 눈으로 말했다.
--- 「별들의 장소」 중에서
개교기념일이라서 게임과 쇼핑을 하며 자유의 몸이 될 걸 기대하는 나에게 이란성 쌍둥이인 시아가 제안을 한다. 나 대신 우리 학교에 좀 가달라고. 그러면 5만 원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걸 그룹 출신의 배우를 볼 수 있다고. 여자 친구인 단비와의 100일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나는 화장과 가발과 마스크로 변장을 한 채 여자 중학교로 향한다. 그런데, 거긴 내가 생각했던 세상이 아니다.
여자로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 생리 때면 엄마와 시아는 모든 일에서 손을 놓은 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아빠와 나를 머슴처럼 부렸다. 여자들의 고통과 인내 덕분에 인류가 유지된다나. 아빠와 나는 남자들의 피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인류는 씨가 말랐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도 뻥끗 못 했다.
--- 「신이 내린 날」 중에서
연재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미주는 자퇴하기로 맘먹고 학교에 갔다가 희영을 본다. 학교 창고에서 나온 희영은 얼룩처럼 번져 있는 반점과 붉은 흰자위, 광기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미주를 찾아온 레아의 말에 따르면 창백한 머리 박쥐가 퍼뜨리는 ‘학폭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것. 연재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감염된 희영의 바이러스는 더 강력한 것이 되어 있었다. 학교를 구하기 위해서는 창백한 머리 박쥐가 성년이 되기 전에 제거해야만 했다. 의구심을 품었던 미주도 결국 레아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고…… 학교 창고에 불을 지른다.
미주는 가슴을 활짝 열고 연재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순간,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거짓말처럼 두려움도 사라졌다. 그래, 할 테면 해봐. 이제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야. 내 옆에는 레아가 있거든. 레아는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아? 게다가 난 연재 네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알고 있어. 중요한 건 내가 널 예전의 너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거야. 아니, 꼭 돌려놓고 말 거야. 그 방법을 찾았으니까, 그때까지만 나쁜 짓 하지 말고 기다려. 제발!
---「레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