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몇 마디 뱉어내기가 무섭게 또다시 자리는 아첨으로 일렁였다. 어떻게든 신기형의 눈에 들어 권세를 유지하고픈 자들의 발버둥은 보기에 처참할 정도로 끈질겼다. 이제 막 관복을 입은 신흥 정객으로부터 머리가 백발이 된 원로 정객까지, 인간의 욕망이란 나이를 구분하지 않았고 때를 구분하지도 않았다.
신기형은 다시 자리가 잠잠해지자 입술을 열었다. 큰일을 앞두었으니 평소와 달리 조금 격양되어 있음은 사실이었다.
“어찌 되었든 아직 임명이 된 것은 아니나, 모두 알다시피 내일 아침 주상 전하의 교지가 있을 예정이외다.”
“미리 받으신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대감!”
“허허, 사람 원.”
결국 신기형은 호방한 웃음을 터트렸다. 입에 발린 말들을 딱히 좋아하는 성미는 아니었으나, 날이 날이었던 만큼 아첨의 말들이 듣기 좋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니, 조선의 내일을 위하여 우리 힘써 봅시다!”
신기형이 크게 외치자 관료들은 술잔을 단숨에 비워 냈다.
“좌상 대감, 아니, 영의정이신 신기형 대감을 위하여 우리 박수 한번 칩시다!”
누군가 제안하니 박수가 터져 흘렀다. 신기형은 술잔을 비워 냈고, 버릇처럼 수염을 쓸며 만끽했다.
---「53화 첫째가는 사내」중에서
옅푸른 빛깔이 물들어 있던 방문에 투명한 빛깔이 차올랐다. 두 손을 모으면 담길 것 같은 햇살이 세상을 하나둘 깨워 일으키기 시작했다. 첫 닭이 울었고, 문지기는 대문 밖 비질을 시작했으며, 부엌 아궁이에선 불질이 한창이었다. 이런 부산한 공간 속 여전히 한밤중인 두 사람이 여기 있다.
잠시 놓으면 사라질까 완은 꿈결이나마 그녀를 꼭 붙들어 안았다. 애가 타는 재회를 끝으로 누가 먼저 눈을 감았는지 알 길은 없었으나, 용희는 미동도 없이 고른 숨소리를 내었고, 부지런하기가 남다르다던 선생께서도 여전한 숙면 중이었다. 각자가 지닌 남다른 체온에 밀려 있던 고단함이 물동이로 퍼붓듯 쏟아져 내린 것이다.
달고 길어 절대로 깨고 싶지 않은, 그러한 시간 속에 두 사람은 모처럼 평온한 아침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먼저 눈을 뜬 것은 용희였다. 쉽게 올라가지 않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보니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선생의 가슴팍이었다. 단정하게 여며 입은 자리옷 사이로 적당한 둘레의 목선이 자리했다.
용희는 잠기운이 가득한 얼굴로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한 방향으로만 누워있던 탓인지 어깨가 뻐근했고, 전부 낫지 않은 팔의 상처가 욱신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염없이 선생의 얼굴을 훑어보지만, 그간의 깊었던 그리움은 씻겨 나갈 줄 모른 채 오히려 몸집을 키워만 갔다.
바라보고 있어도 마음이 식질 않으니 스스로 기함할 노릇이었다.
“그만 보아라. 닳겠다.”
“아, 일어났소?”
“눈살에 찔려 안 일어날 재주 있겠나.”
완은 오랜만에 곤히 잤다는 듯 쉽게 눈을 떴다. 마주한 두 눈빛에 애정이 가득하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흘렀다.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나는 조금 더 잘까 한다.”
---「53화 첫째가는 사내」중에서
“홍시야, 내가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아느냐? 응?”
“그랬소? 미안하게 됐소. 내가 의식이 없어서 연락을 못 했지 뭐요.”
“너를 찾겠다고 내가 산 정상까지 다섯 번은 오르고 내렸을 것이다.”
“정말? 힘들었겠다.”
완은 지담의 얄팍한 술수에 미간을 좁혔다. 그 산을 너만 올랐느냐…….
“그것뿐이냐?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요 며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미안하오, 미안. 나 때문에 고생 많았겠소.”
너만 정신없었느냔 말이다……. 완은 조금 더 미간을 좁혔다.
동궁의 어지러웠던 성심, 밤낮을 잃었던 슬픔에 대하여 말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저 사특한 지담 녀석은 본인의 영웅담만 입에 올리기 급급하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걱정을 그리도 많이 해주다니. 역시 내게는 지담이 첫째가는 사람이오.”
“지담!”
용희의 입에서 첫째라는 말까지 나오자, 기어이 참지 못한 둘째가는 사내께서 지담을 불렀다. 그제야 동궁의 모습을 확인한 지담은 황급히 용희의 손을 놓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53화 첫째가는 사내」중에서
중궁은 왕과 시선을 마주했고, 한참이나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누가 들을까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하, 영상의 여식이 살아 있습니다.”
들어 감당되지 않을 이야기를 쏟은 뒤 중궁은 덤덤히 익선관을 집어 들었다.
“누가, 누가 살아 있다고?”
“듣지 않으셨습니까. 얼마 전 관직을 잃었으니 죄인 김판두의 여식이라 해야 옳겠지요.”
익선관을 들어 올렸으나 머리에 쓸 기미가 없는 지아비를 바라보다가, 중궁은 팔을 도로 내리며 잠시 때를 기다렸다.
“그 아이가, 세자를 도운 통역 아이라 합니다.”
충격이 잠잠해지기도 전에 다음 충격이 밀려들어, 왕은 말을 잃은 표정으로 중궁을 응시했다. 뜻을 알기 어려운 심오한 얼굴색이었다.
“하늘의 장난인 듯합니다. 그 아이가 세자 곁에 있었다지 뭡니까.”
그것도 다름 아닌 통역의 아이라. 세자의 마음을 앗아간, 세자의 마음을 쥐락펴락한.
“이 일을 어쩐답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첩 혼자는 답이 나오지 않아…….”
중궁은 결국 긴 한숨을 내쉬었다.
---「55화 다시 만나기 위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