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송미, 제발 입 다물어. 한번이라도 고민이란 걸 해본 적이 있니?'
상숙이는 발을 재게 놀리면서 입원실을 훑어보았다. 송미와 재희가 뛰어가 상숙이를 따라잡았다.
'우린 하루종일 얘 때문에 뛰기만 하는 것 같아. 젠장, 이 바진 너무 꼭 죄는 거 있지? 뛸 때마다 허벅지가 쓸려. 분명한 건 이 바진 방뎅이가 입진 않았을 거라는 얘기야. 걔가 입었다면 지금쯤 다 터져버렸을 테니까 말야.'
'걱정하지 마. 방뎅이 옷은 내가 입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아까부터 허리가 줄줄 흘러내리는 걸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구.'
--- p. 62
재희가 손가락으로 젊은 남자를 가리키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돌이 중국집 유리창을 깼다. 깨진 보도블록 한 조각이 북경반점이라고 쓰인 유리창의 '경'자 부분을 뚫고 들어와 중국집 가운데 떨어졌다. 놀란 주인이 잠깐 방심한 사이 재희가 주인을 냅다 떼밀었다. 상숙이가 튀듯이 가게 밖으로 달아나고 그 뒤를 재희가 뒤따랐다.
잠깐 중심을 잃은 주인의 손이 화급히 재희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재희의 몸은 벌써 중국집 문 밖으로 달아난 후였다. 중국집 주인의 손에는 노란색의 값싼 인조 가발이 쥐어져 있었다. 돌을 던진 송미는 저만큼 앞서 달리고 있었다. 상숙이가 뒤쳐지는 재희의 손을 잡고 뛰었다. 뒤늦게 주인이 뛰쳐나왔지만 상체만 발달했을 뿐인 빈약한 두 다리로는 쫓아올 염두조차 내지 못했다.
--- p.82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들이었다. 수업종이 울리면 교실로 들어가 너희들은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라고 빤한 거짓말을 해댄다.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니, 그 같은 폭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것은 무거운 가방과 스트레스뿐이다.
--- p.150-151
구멍 뚫리고 찢긴 문풍지로 바람이 불어왔다. 방문 맞은편에 걸린 과일 커튼 자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난 놀라지 않아요. 모습을 나타내도 좋아요. ....저기요, 이렇게 불쑥 찾아왔다고 화내지는 마세요. 한번도 만나지 않았던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비웃어도 좋아요. 저기요, 난 조금 아파요'
상숙이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래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심각하죠.'
상숙이는 큼큼, 목소리를 다듬었다. 부러 명량한 목소리를 냈다.
'거긴 어떤가요? 있을 만해요? 죽는 거 말예요. 정말 어때요?'
--- p.147-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