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불행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다름 아닌 결혼이란 제도라고 난 결론지었다. 청춘남녀가 만나 열정적인 사랑을 한다. 그냥 사랑만 하다가 헤어지면 아름다운 추억이 될 텐데 둘은 헤어지기 싫어 함께 산다. 열정이 식을 때쯤, 또는 식기 전에 아이들이 태어난다. 부부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헌신하게 된다. 그 헌신은 끝이 없다. 끝없는 헌신에 지친 부부는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 미워하다가 용서하고 용서하다가 미워하면서 부부는 비로소 다름을 발견하고 당황하다가 서로를 포기하고 포기하다가 종국엔 불행해진다. 그렇다면 답은 이혼뿐인가? 홀로 사는 것인가?
---「믹스 커피」중에서
하지만 난 나를 믿기로 했다. 모두가 아니라 해도, 과학마저 아니라 해도 난 간절하게 나를 믿고 싶었고 그래서 그 간절함을 믿기로 했다. 놈은 죽기 않았다. 확실하다. 마침내 놈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자 온몸에서 따듯한 열기가 솟아올랐다. 심장 울림이 명확해졌고 머리에선 따스한 뭔가가 피어올랐다. 이게 뭔가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것은 바로 기쁨이었다. 오빠에게 환한 미소를 한 번 더 보여주면서 따듯한 육수 한 잔을 들이켰다.
“서준표, 너, 딱, 기다려!”
---「평양냉면」중에서
수없이 많은 상상 속에서 놈은 매번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나타났지만 내게 다가오는 모습만은 늘 가느다란 빗줄기처럼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가만히 내려와 큰 덩치지만 의외로 수줍은 모습으로 내 앞에 서서 아주 작은 미소만 살짝 보이는, 나름 꽤 멋진 장면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상상과 같지 않았다. 어쩜 이리도 완연하게 다른지. 놈은 화창한 날씨에 불어닥친 한여름 폭풍우처럼, 그렇게 시끄럽고 떠들썩하고 요란하고 거세게 성큼 달려와 날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껄껄 웃어댔다. (…) “그래, 궁댕이뼈는 다 붙었냐?”
---「콩팥」중에서
60년을 살아보고 나서야 또 알게 된 것. 인생은 절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는 게 힘겨운 것이다. 어느새 난 아이들이 준비한 각본이 엉망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놈의 마지막 말이 끝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구나.
---「양장피」중에서
“승희야, 너한테 부탁이 있다.”
‘부탁 무슨 부탁?’
“두 달, 아니 한 달. 내게 딱 한 달만 시간을 줘. 나랑 한 달만 같이 있어줘. 그다음엔 다른 남자에게 가든지 말든지 니 마음대로 해.”
같이 있어달란 뜻이 정확히 뭘까? 설마 한집에서 살겠다는 얘긴 아니겠지?
“어떤 이유였든 내가 내 자리를 비워서 생긴 일이니 이건 내 책임인 게 맞다. 인정해. 하지만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인정하는 것이고 그 전에 너하고 난 연인이었잖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기회를 달라는 거야. 나랑 한 달만, 딱 30일만…….”
---「양장피」중에서
구겨진 놈의 메모장을 꽤 오랜 시간 들여다봤다. 놈의 못생긴 글씨엔 몇 번을 덧쓴 자국들이 선명했다. 머리가 나쁜 편인 놈이 뭔가를 외워야 할 때 하던 버릇이었다.
젠장, ‘키오크스’라니.
자주 있는 일이었다. TV 경연 프로에 나왔던 ‘울랄라세션’은 ‘울트라세션’으로, 서양 배우 ‘울버린, 휴 잭맨’은 ‘잭 휴맨’으로. 아니라 해도 놈은 자기가 맞다고 빡빡 우겨댔다. 며칠 전 중국집에서도 놈은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후계동에서 전당포를 하는 원빈이 나왔다고 끝까지 우겼다. 그까짓 ‘키오크스’ 정도야 뭐.
---「납작만두」중에서
“그날 말이야, 내가 임용고시 포기한다고 엄마 아빠한테 처음 얘기했던 날이 하필 아빠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블루베리 케이크를 사 온 날이었어. 내가 포기하겠다고 하자 아빠가 제일 처음 한 행동이 바로 벌떡 일어나서 그 케이크를 들고 나가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린 거였어. 정말 기억 안 나?”
이상하게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은 안 났지만 놈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참 힘든 시간들이었다.
“아빤 그게 그렇게 미안했었나 봐. 그 마음이 그냥 전해지더라고. 사라, 요한이한테도 주지 않고 혼자서 식탁에 앉아 아빠가 보낸 케이크를 먹는데 저절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거야. 한참 옛날 생각을 하다가 용기를 내서 아빠한테 전화를 했어. 그리고 또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땐 나도 미안했다고 했지.”
다행이었다. 딸이 메고 다니는 커다란 배낭에서 벽돌 한 장이 빠진 셈이었다.
---「블루베리 케이크」중에서
“그래서 무려 7년 동안이나 숨어서 지냈다는 거야? 그게 말이 돼?”
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천천히, 평소보다 더 굵은 목소리로 내게 답을 했다.
“솔직히 그렇게 괴롭기만 한 건 아니었어. 그게 참 묘하더라고. 처음엔 진짜 견디기 힘들었지만 이게 차츰 나아지는 거야. 왜 그럴까? 처음엔 몰랐어. 그러다가 알게 되었어. 내가 바로 가장이란 신분을 벗어버렸다는 거. 인생이 연극이라면, 우리 가족이 배우라면 난 매번 긴장을 해야만 하는 주연이었어. 책임감, 부담감.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관객이 되어서 객석에 앉은 거야. 비록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난 그게 꽤 편했어. 그래서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 관객으로 말이야.”
---「승희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