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일어날 경우 남한이 버티어 낼 수 없다는 점이 확실해지면서, 전쟁의 징조는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먼저 38도선 인접 지역에 사는 북한 측 민간인들이 4~8킬로미터 정도 북쪽으로 소개(疏開: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하는 것)되었다. 여기에 군사용 도로도 건설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보가 미국 정보참모부에는 보고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측에서는 “북한군의 전력이 계속 증강되어 대한민국을 침략할 수 있었다는 점은 모든 정보기관이 다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날짜와 침략이 임박했음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군 측에서는 6월 22~23일 입수된 첩보를 분석하여 적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점을 알아챘다. 대한민국 정보 실무자들은 “북괴의 전면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며, D-Day(작전개시일)는 이 날(6월 24일)이나 다음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섞인 결론을 내렸다. 이외에도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밤새도록 적의 공격을 예고하는 보고가 간헐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6월 24일 15시, 채병덕 총장을 위시한 주요 간부들이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긴급 회합을 가지고 상황을 분석했다. 이 자리에서 비상경계령 해제의 즉각 중지, 즉시 휴가 및 외출 중지, 그것도 안 되면 최소한 2/3 병력의 영내 대기 등의 건의가 나왔다. 그러나 이 모든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일한 대책이라는 것이 “첩보대를 주요 지점에 파견해서 상황을 살피고 다음날 08:00까지 보고하라”는 정도였다.
오히려 국군 지도부는 이렇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에 그때까지 걸려 있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그러면서 많은 병사들이 휴가를 나가 버렸다. 이 바람에, 그나마 열세였던 전력조차 사실상 붕괴되었다. 더구나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선으로부터 먼 후방에서 공산 게릴라 소탕에 투입되어 변변한 예비대도 없는 상태였다.
더욱이 전쟁이 터지기 불과 몇 시간 전인 24일 밤, 육군회관 장교클럽 준공 파티가 열렸다. 여기에는 군의 실질적 책임자인 채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한 육군본부의 참모장교는 물론이고, 각급 부대 지휘관에 참모학교 요원과 교육을 받던 사람들까지 참석하여 밤늦도록 연회를 벌였다. --- p.21~22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한강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국군의 전력은 붕괴 상태였다. 여기에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위한 교통 통제까지 제대로 하지 못하여 결국 방어에 실패했다. 그러나 곧 미군이 투입되면서 북한군의 진격 저지에 나섰다. 미국이 개입한 덕분에, 제공권은 유엔군과 국군 측으로 넘어왔다. 이 덕분에 낮에는 북한군이 움직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미군과 국군 사이의 혼선을 방지하기 위한 역할 분담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미군과 국군은 서울?부산 국도를 기준으로 방어선을 분담했다. 경부 국도 서쪽의 전선을 미군이, 동쪽 전선을 국군이 분담하기로 한 것이다.
미군 투입으로 인하여 여러 이점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초반에는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미군과 국군은 후퇴하면서 방어선을 바꾸었다. 7월 12일 경 서부 전선의 미군은 금강을 방어선으로, 중동부 전선의 국군은 소백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 p.39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문제가 이와 같이 진행되는 동안, 맥아더는 10월 1일 유엔군 사령관 자격으로 인민군 총사령관에게,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항복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를 묵살했다.
북한 측에서는 38선에서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때 북한군은 2만 5,000명에서 3만 명 정도가 38선 넘어 북쪽으로 후퇴할 수 있었고, 3만 명 정도는 지리산과 소백산맥, 태백산맥에 잠입하여 유격전을 벌이거나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규모의 병력조차 보급이 끊어진 채로 대부분이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따라서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유격전을 벌이는 북한군 패잔병을 소탕하기 위해 적지 않은 병력이 투입되어야 했다. 이 점이 이후 북진에 악영향을 주는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 속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한 후, 맥아더가 세운 전략의 개요는 이랬다. 미 제8군은 서울에서 평양 방면인 북서 방향으로 진격하며, 미 제10군단은 원산에 상륙한 다음 서쪽으로 진격해서 미 제8군과 합류한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정주에서 영원을 경유, 흥남에 이르는 가장 좁은 전선(戰線)으로 설정된 목표선까지 진격한다. 그 이북으로는 국군의 진격만이 허용된다. --- p.57~58
트루먼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맥아더가 고의적으로 자신의 정책을 방해하려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맥아더가 성명을 발표한 날, 이승만도 유엔군이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어서는 안 되며, 북진하여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이 유엔의 목표였으며, 이를 포기하면 한국은 번영은 물론 존속조차 곤란해지고, 지금까지 노력한 보람도 없이 또다시 남북한의 충돌 위험을 방치하는 결과라는 취지였다.
미 국무성은 즉각 맥아더가 자신의 권한을 넘어선 발언을 한 데 대해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파문이 쉽게 가라앉을 리 없었다. 결국 맥아더가 전쟁의 확대를 피하려 했던 미 행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어 버린 셈이다.
사실 맥아더가 독단적으로 행동해서 대통령을 비롯한 미 행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어 버린 일은 이전부터 계속되던 것이었다. 먼저 미 행정부는 한국전쟁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던 대만의 요청을,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거절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대만의 개입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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