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브랜드 리리컬(Lyrical) 회장의 아들이자 사내 이사이며, 얼마 전 향수사업부로 발령을 받은 대한민국 대표 잇보이(It boy), 임수현. 금수저에다 부족한 것 없는 그가 서민이 사는 연립아파트로 왔다. 그것도 그녀의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
“어라? 박 비서? 여기 살았어?”
차림새 또한 어울리지 않았다. 회사에서 보았던 깔끔한 슈트는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그의 늘씬한 몸은 트레이닝복에 감춰 있었다. 어느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 입었던 것처럼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듯 우스꽝스러웠다.
회사에 출근하다 말고 아는 얼굴을 마주쳐버린 세영은 자기도 모르게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수현은 아주 뻔뻔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네. 여기가 제 집인데…….”
그녀가 손끝으로 그가 서 있는 곳 옆문을 가리키자, 그가 또 한 번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응? 우리 박 비서가 여기에서 살 줄이야.”
우연? 웃기고 있어. 내 정보 전부 가지고 있으면서.
회사에서만 보던 악마를 여기서 만나다니. 아니, 이젠 매일 마주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멀뚱히 수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세영의 표정에 수현의 입가로 벙싯 미소가 떠올랐다.
“박 비서, 지금 출근하는 거지?”
“네, 본부장님.”
그는 들고 있는 봉지 안에서 아직도 따끈따끈한 시루떡 포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말 뜬금없는 전개라 세영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받으며 물었다.
“이,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떡이지.”
떡? 지금 이사 왔다고 떡 돌리는 거야?
“떡? 박 비서는 그런 걸 먹어? 하여간 입맛 미개한 건 알아줘야 해.”
“전 떡 정말 좋아하는데요, 본부장님. 방금 말씀은 조금…… 기분이 그렇습니다.”
불과 3개월 전, 그가 그렇게 떠들었었다. 떡 같은 미개한 걸 도대체 왜 먹냐고 말했던 그였다.
“나도 이제 떡이 좋거든. 박 비서가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꼴이 참 같잖다. 그동안 싫어했던 떡을 갑자기 좋아한다는 이유도, 그가 자신의 옆집으로 이사 온 이유도 눈치챈 그녀는 그 자리에 그와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급하게 떡을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저, 저는 먼저 출근하겠습니다, 본부장님.”
“응응, 그래. 회사에서 봐, 박 비서. 어쩜 이렇게 부지런한지 몰라. 꼭 나 피하는 것처럼.”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급하게 계단을 내려서며 생각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지?’라고. 도대체 뭐 때문에 그가 자신의, 아니, 어쩌다가 이웃집에 악당이 들어왔냐고! 그러나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뜀박질을 하던 다리가 멈췄다. 그가 갑자기 달라진 태도를 보인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저 인간, 내가 지 고백한 거 찼다고 이러는 거야?”
그날, 고백 거절의 나비효과로 이웃집에 악당이 이사 왔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