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 곁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숱하게 겪었다.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산더미를 이룬 시신도 보았다. 사람을 죽였고, 자기 자신을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 환경은 처절했고, 심경은 절박했다. 김구는 칠십 평생을 회고하며 “살려고 산 것이 아니다. 살아져서 살았으며,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라고 말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살았던 한평생은 역설적으로 죽어도 죽지 않는, 살아 있는 역사로 남아 영원한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다. - 「1장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중에서
◆ 돌아보면 가족이 같이 산 날보다 헤어져 산 날이 훨씬 길었다. 또 피지도 못한 어린 것들, 고생만 한 아내, 효도 한 번 해드릴 겨를이 없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먼저 보내야 했다. 가족을 보살피기는커녕 관심조차 제대로 기울이지 못했다. 지지리도 부족한 자식이며 못난 남편, 냉정한 애비였다. 그래도 내겐 가야 할 길이 있었다. 겉으로 소리 내 울지도 못한 채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던 외롭고 쓰라린 세월이었다. - 「1장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중에서
◆ 아버지의 어릴 적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운명하실 때 왼손 약지를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흘려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했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내가 태어났다. 할머니 기일이 내 생일이 된 것이다. 말년에 중병이 들어 열나흘 동안 내 무릎을 베고 계시던 아버지는 경자년 12월 9일, 애써 잡으셨던 내 손을 놓으면서 먼 길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가 우리 할머니 임종하실 때 그러셨듯이 자식 된 도리로 나도 손가락을 자를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머니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실까 싶어 당신 모르게 허벅지 살을 베어냈다. 왼쪽 허벅지에서 살 한 점을 떼어내 고기는 불에 구워 약이라 속여 잡숫게 하고, 피는 입안으로 흘려 넣어드렸다. 그것만으로는 양이 모자란 듯해 다시 칼을 들어 이번엔 좀 더 크게 떼어내려고 백배 천배 용기를 내 살을 베었지만 살 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극심했다. 결국 다리 살을 베어만 놓았을 뿐 손톱만큼도 떼어내진 못했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손가락을 자르거나 허벅지를 베는 일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거로구나, 나 같은 불효자는 시늉만 내다가 마는구나!” - 「2장 백범은 ‘백범’인가?」 중에서
◆ 해가 바뀌자마자 전봉준을 필두로 하여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 4월 전주성을 함락시킨다. 이를 빌미로 6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동학군은 해주성 공격에 실패한 데 이어 공주 우금치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한다. 우국충정과 분노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19세 소년은 깨닫게 된다. 역사의 주도권은 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고, 동학도의 세는 급격히 기울어진다. 동학의 ‘아기 접주’로 명성을 날리던 김창수는 선봉장으로 나섰던 해주성 전투의 실패를 자책하며 교훈을 얻는다. 훈련 받지 못한 오합지졸로는 백전백패임을 절감하고 우선은 군사훈련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런 창수에게 찾아온 정덕현과 우종서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을 것이다. 두 사람을 대하는 백범의 태도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노련함과 친화력, 열린 의식 등 지도자의 자질을 읽을 수 있다. - 「3장 틀 속에 갇혀 틀을 깨려 하건만」 중에서
◆ 김구의 아내 최준례가 10대 소녀 시절부터 자유 결혼을 꿈꾸었을 뿐 아니라 실천했다는 사실이 경이롭고 신선하다. 여성의 성향이나 의사는 고려 대상이 아니고 혼사에 전혀 반영이 안 되던 시대에, 그것도 어머니가 이미 오래전에 다른 청년을 예비 사위로 못 박아 놓은 상황에서 말이다. 김구 또한 당시 조혼으로 인한 갖가지 폐해를 절감하고 있던 터라 이 신여성을 동정하고 그녀의 입장에 깊이 공감했다. 둘은 한마음이 되어 관습의 벽을 훌쩍 뛰어넘는다. 여러 차례 가슴 아픈 경험을 뒤로하고 마침내 천생연분, 필생의 동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 「5장 고뇌와 갈등의 청년기」 중에서
◆ 백범은 신문을 받을 때마다 지옥을 경험했다. 매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뒤에야 유치장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 목청껏 외치곤 했다. “내 목숨은 빼앗을 수 있어도 내 정신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간수들이 제지하고 윽박질렀지만, 김구의 부르짖음은 감옥을 우렁차게 울리며 좌절한 동지들의 신념을 다시 일으키는 지렛대가 돼주었다. 그런 김구도 고깃국 냄새엔 코가 먼저 반응했다. 온유한 낯빛과 공손한 말투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꾸짖고 마음을 다잡았다. - 「6장 세상 밖의 감옥, 감옥 안의 세상」 중에서
◆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나는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나를 청사 문지기로 써달라고 청원했다. 이유는 연전 본국에서 교육 사업을 할 때 내 실력과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알아보려고 순사 채용 과목을 혼자 시험쳐본 결과 내 점수론 합격이 어려움을 절감했고, 또 문지기보다 높은 자리는 허영을 탐해 실무에 소홀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별호를 백범으로 고친 연유까지 설명하며 설득하자 안 동지는 흔쾌히 국무회의에 올리겠노라고 말했다. 그랬는데 하룻밤 사이에 내용이 바뀌었다. 도산이 홀연 내게 경무국장 임명장을 내민 것이다. 그때는 각 부서 차장이 총장 직권을 대리했는데, 청년 차장들이 연장자인 내가 여닫는 문을 드나들기가 아무래도 겸연쩍고 거북스럽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하기야 도산보다도 내가 두 살 많긴 했지만, 나로선 생각지도 않은 문제였다.
“뜻은 고맙지만 나는 일개 순사 자격에도 못 미치는 사람입니다. 경무국장 자리는 감당하기 벅찹니다.”
“겸손의 말씀, 자격은 충분합니다. 지금 같은 혁명기엔 정신을 보고 인재를 쓰는 법입니다. 오랜 감옥 생활로 왜놈들 실정을 잘 아는 백범만한 적임자가 또 누가 있겠습니까?” - 「7장 자유를 위한 헌신 : 혁명가의 길(1)」 중에서
◆ 백범은 결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았으며, 나이, 지역,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았다. 사람을 끄는 힘도 출중했다. 이봉창과는 상해의 뒷골목을 함께 누비고 좁은 여관방에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우국담론을 토로한다. 김구의 열린 마음과 애국 열정 그리고 삿됨이 없는 정의감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고 한 길로 가게 한다. 엄혹한 임시정부 시절, 배신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상해에서 한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목숨까지 던져가며 김구와 더불어 모진 풍파를 무릅쓴 수많은 애국자와 투사는 그렇게 태어나고 길러졌다. 그들은 기꺼이 싸우고 또 죽었다. - 「8장 자유를 위한 헌신 : 혁명가의 길(2)」 중에서
◆ 임시정부는 월세도 못 낼 만큼 가난에 쪼들렸지만, 김구 몸엔 60만원이란 천문학적 현상금이 붙었다. 임정 청사의 월세나 일반 노동자 월급이 30원 안팎이던 시대였다. 60만 원이면 청사 임대료 1,600년치를 내고도 남을 거액이었다. 잡기만 하면 일확천금할 기회였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인 밀정뿐만 아니라 중국인, 심지어는 서양인들까지 김구를 잡으려고 여기저기 사냥개처럼 냄새를 맡으며 쑤시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백범은 ‘움직이는 복권’이 되어 동가식서가숙하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도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다행히 도와주는 이들, 눈감아주는 이들이 많았다. 날마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한인 노동자와 주부들로선 평생 팔자를 고칠 현상금이었지만, 김구의 실체를 아는 동포 중 어느 누구도 밀고한 이가 없었다. 오히려 숨겨주고 따뜻한 밥을 제공했다. 그들에게 백범은 현상금 60만 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 「8장 자유를 위한 헌신 : 혁명가의 길(2)」 중에서
◆ 백범 역시 누구보다 애타게 고대했을 ‘그날’이 왔다. 조국 광복의 날이 밝았다. 그런데 왜 기쁘지 않았을까? 일제의 무조건 항복은 김구에게 복음이 아닌 비보였다. 일지에서도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김구 말고 이런 위험한(?)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백범일지》가 얼마나 솔직한 고백록인가를 또 한 번 웅변한다. 김구는 우선 수십 년간 준비하고 열망한 보람도 없이, 독립된 조국에 광복군이 ‘해방군’으로 진입하
지 못하게 되어 너무나 아쉬웠을 것이다. 또 무엇보다 향후 전개될 통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외세의 영향력은 커지고 우리 정부의 발언권은 약화될 것을 걱정했다. - 「9장 마지막 그날까지」 중에서
◆ 나는 상해에서 18일을 머문 다음 1945년 11월 23일, 1진으로 선발된 열네 명과 함께 서울행 프로펠러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선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의 “보인다!”란 외침이 무겁게 가라앉았던 침통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손바닥만 한 비행기 창 아래로 푸른 바다에 올망졸망 떠 있는 섬들이 나타났다. 누군가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곧 합창으로 번졌다가 울음소리로 흐려졌다. 비행기는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흙을 한 줌 움켜쥐고 고국의 냄새를 맡았다. 떠난 지 26년 7개월여 만의 귀환이었다.
- 「9장 마지막 그날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