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침묵은 그저 공허와 죽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 침묵은 우리를 충만한 생명에로 더 가까이 이끌고 더 가까이 데려갑니다. 우리는 침묵합니다. 우리 영혼이 살아 내고자 하는 말씀이, 이 세상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카르투시안의 침묵」중에서
우리 카르투시안이 입술로 말하지 않고 펜으로 글을 쓰지 않는 대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선하신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침묵은 죽음의 침묵이 아닙니다. 우리의 침묵은 성소의 거룩한 평화이고, 우리의 작은 수가는 우리 영혼처럼 어떤 분이 차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중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깨닫고 있는 것보다, 그리고 우리가 되돌려 갚아 드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약함은 사랑에 있어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맺어진 관계 안에서는, 약함이 무한한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함 안에서, 기도 안에서, 그리고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고자 하는 소망 안에서, 일치된 상태로 머물도록 합시다.
---「'늘 오래되고 늘 새로운’ 영원」중에서
우리가 거룩한 진리를 인식하는 것, 특히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인식하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마치 눈이 색채와 형태를 인식하듯이, 그리고 정신이 우리가 관념이라고 부르는 어떤 대상의 인식 가능한 측면을 인식하듯이 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더 높은 또 다른 차원의 세상, 하느님의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믿음은 그곳을 알아보게 해 주는 빛입니다.
---「믿음의 빛」중에서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인의 무심함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이는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 사랑,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소통하는 사랑이며, 자신을 내어 주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질서 있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포기가 무심함입니다. 따라서, 무심함은 사랑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무심함은 사랑이 지니고 있는 이치이며, 내 안의 사랑에 질서를 부여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무심함」중에서
선하신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사람과 사물을 높은 데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섭리 안에서, 위대한 것들이 작은 것들과 대조를 이루며 돋보이게 만드십니다. 넓은 시야 안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런 시각은 우리에게 유익하며, 우리의 참된 자리를 찾아 줍니다. 우리는 거대한 합창단에서 하나의 파트를 맡고 있으며, 그것이 아름답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높은 데서 보아야 합니다」중에서
일상에서 오는 사소한 일들로 인해 마음이 너무 산란해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것은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우리 영혼은 그 모든 것보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더 위대합니다. 영혼이 지니고 있는 이 위대함에는 덧없는 모든 산란함을 넘어서게 하는 능력이 있으며, 그저 지나가는 무상한 것을 통해서도 영원한 것에 손을 뻗어 닿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나 상황은 단지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이것을 해결하시는 분, ‘사랑의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일의 십자가」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통은 고요하게 머물러 있어야 하며, 그보다 더 큰 기쁨 안에 잠겨야 합니다. 고통은 우리의 비참에서 오고, 기쁨은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악한 것보다 훨씬 더 무한하게 선하십니다. 기쁨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배경이고 최종 목표이지만, 고통은 단지 그 길이 갖고 있는 한 측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려 애쓰십시오」중에서
우리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깊이 새기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가장 진정한 형태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느님, 저는 저의 약함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께 봉헌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제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제게 더 많이 베푸실 때, 저도 당신께 더 많이 드릴 것입니다.”
---「내적인 삶」중에서
우리가 대체로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평화를 지니지 못한 것’과, ‘평화를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혼동합니다. 감성이 폭풍처럼 크게 요동칠 때, 우리는 폭풍 외의 다른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합니다. 폭풍이 우리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평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평화」중에서
나는 ‘잠들다’와 ‘쉬다’, 이 두 단어에 대해 묵상하기를 그대에게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성령께서 이들을 함께 연결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대가 아시다시피, 쉼이 되지 않는 잠이 있는 반면에, 존재에 쉼이 되어 주는 잠이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잠은 모든 근심과 염려를 온전히 그분의 손에 맡겨 드리는 영혼의 잠이며, 이것이야말로 참된 쉼이 되는 잠입니다.
---「‘잠들다’와 ‘쉬다’」중에서
늘 사랑 때문인 오직 그분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평화를 맛보지 않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평화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과 실제로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영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들은 그분에게서 오는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대단히 멋진 일이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의지」중에서
하느님은 성인들에게 생명이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생명이 되어 주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가장 분주한 순간에도 말입니다. 교회나 그 외의 기도 장소에서 고요하게 머물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때때로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움직임, 삶은 그런 것입니다.
---「단순한 삶」중에서
영적인 삶과 일상의 삶, 이 두 삶은 매우 다릅니다. 따라서 이 둘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삶을 분리된 채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이들이 서로 어우러지게 해야 합니다. 성령이 사시는 삶이 스며들고 깊이 퍼져서 일상의 삶을 비옥하게 해야 합니다. 어려운 동시에 가장 무난한 비결은, 우리 존재의 전반적인 리듬 안으로 하느님을 모셔 오는 법을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을 몸에 익힌 사람은 불행히도 정말 드뭅니다.
---「영적인 삶과 일상의 삶」중에서
우리가 겪는 덧없는 불행에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외에 다른 치료법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마음의 광대함에 비해 너무나 편협하고 덧없는 쾌락과 소유물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불행에 대한 치료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