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기록을 보면, 요셉은 노예로 팔린 뒤 22년 동안 아버지 야곱을 찾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처음 13년 동안은 노예와 죄수의 신분이었으니까, 아버지를 찾지 않은 것이 아니라 찾지 못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나서 9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아버지를 찾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 요셉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트라우마로 인해 22년 동안이나 사랑하는 아버지와 동생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처음 13년 동안은 종과 죄수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돌아갈 수 없었지만, 나중9년 동안은 그저 잊으려고 애쓰면서 기억에서 지우고 싶으나 지워지지 않는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형들을 만나게 되고, 결국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이제야 진정 요셉은 자신의 꿈을, 자신이 원하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이루게 되었다.
요셉은 꿈을 꾸는 자에서 꿈을 해석하는 자로, 그리고 마침내 꿈 자체가 되었다.
요셉의 인생이 달라진 것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 아니라 꿈을 해석하면서부터이다. 요셉의 꿈은 결국 형들을 능가하겠다는,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넘어서겠다는, 자기 욕심에 기초한 소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소원이 결국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요셉이 의도하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이루어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꿈이, 나의 마음에 더 합하다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입에서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꿈은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어야 한다. 꿈꾸는 자 요셉은 그 꿈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겪었지만, 꿈을 해석하는 자 요셉은 그 해석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요셉의 원래 꿈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 아니었지만, 애굽의 총리가 됨으로써 원래의 꿈을 다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의 꿈이란 지금의 요셉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다만 요셉이 지금의 상태에 더욱 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이와 같다.
---「1부 백그라운드의 뒤편 / 꿈꾸는 자와 꿈을 해석하는 자」중에서
인간의 법정은 형벌을 결정하기 위해 열리지만, 주님의 심판대는 상급을 결정하기 위해 열린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형벌을 받지 않은 모든 사람이 무죄이지만, 주님의 심판대에서는 상급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이 유죄이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한 사람이 형벌을 받지만,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는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은 사람이 형벌을 받는다. 형벌과 상급은 모두 증거에 의해서 결정된다. 상급의 증거는 바로 믿음으로 행함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증명되지 않은 믿음으로, 주님의 심판대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또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증거 능력이 없는 것으로서 당연히 아무 상급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2부 기독교인문학을 넘어서 / 오직 믿음으로」중에서
그렇다면, 사랑이 그렇게 본질적이고 위대한 덕목이라면, 왜 성경은 사랑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는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면서, 어째서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일까?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사랑보다 더 실현하기 쉬운 덕목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셨으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지 모른다. (만약 소망으로 구원받는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믿음이란 언제나 기대치를 전제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그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으면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덕목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조건이 없는 법이다.
믿음의 본질은 언제나 누구(무엇)에 대한 믿음인가 하는 것이다. 믿음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 누구(무엇)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믿음의 내용 자체는 선한 것일 수도 있고 악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믿음의 성립/불성립은 믿음의 대상이 어떻게 행동(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2부 기독교인문학을 넘어서 / 사랑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