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라는 물음에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다.’ 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는 조주의 제일구(第一句)이다. 사실 뜰 앞의 소나무면 어떻고, 뜰 앞의 장미면 어떤가? 문제의 요점은 ‘뜰 앞의 잣나무’가 아니다. ‘왜 그 잣나무가 거기 있는가?’란 물음 속에 답이 내재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시절 인연이며, 오묘한 이치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연기법적으로 보아도 잣나무가 거기 서 있어야 할 일이 있었을 뿐이다. 잣나무가 거기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기(緣起)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불법이며,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다. 조사가 온다면 어디서부터 오며, 조사가 간다면 어디서부터 가는 것인가? 온다 함도 맞지 않고 간다 함도 맞지 않다.
- 상권 본문 73쪽
본분사(本分事)는 본래사(本來事)라고도 한다. 본분사란 본래면목을 밝히는 일이다. 본래 자신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가르침이며, 구족하고 원만한 자성불이니 다시 깨달을 필요가 없는 것이 본분사를 밝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주는 본분사로 지도하겠지만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교종에서 가르치는 삼승(보살·성문·연각) 십이분교(경·율·론)로 지도한다고 선언하였다.] 삼승 십이분교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일생을 두고 가르치신 교학인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말한다. 선원에서 경을 보지 말라고 하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깜깜이들을 가르치는 데는 백만 가지 방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상권 본문 165쪽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도는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분별하고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대개 지도(至道)를 지극한 도(道)로 번역하지만 이는 잘못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도는 지극하거나 지극하지 않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유혐간택이라는 명제를 놓고, 조주는 ‘나는 간택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한 학인이 물었다. ‘모른다면 어떻게 하여 명백한 곳에도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 잘못 물었다. 조주는 분명 간택하는 ‘곳에’ 있지 않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대들은 무엇(간택)을 애지중지할 것인가?’ 하였다. 이 학인은 잘못 알아듣고 똑같은 말로 스님한테 무엇을 애지중지하느냐고 물었다. 달마불식(達磨不識)을 기억하는가? 조주는 이 달마불식을 한 것이다.
- 상권 본문 204쪽
불합불산(不合不散), ‘합쳐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거울은 물건과 서로 떨어져 있으나 항상 같음을 비추니 합친 것도 아니며 떨어진 것도 아니다. 광명이 세상을 비추면 세상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광명이 사라진다고 하여 그 모습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말한 ‘합쳐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 한 마음이다. 이 한 마음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운다고 볼 수 있겠다. 조주는 ‘너에게도 하나가 있고, 나에게도 하나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 상권 본문 347쪽
청화상부답화(請和尙不答話), ‘스님께서는 답하지 마십시오.’ 이 학승은 작가 냄새가 난다. 답하지 말라는 그의 말속에 뼈가 있다. [‘내 질문에 만약 답하면 조주 당신은 천길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고 엄포를 놓으니 조주는 순순히 따라 준다.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그래, 그래.’ 하였다.] 『벽암록』 70칙 평창에서 백장 선사가 위산에게 물었다. “입을 꽉 다물고 어떻게 일러 볼 수 있겠는가?” 그러자 위산은 “화상이 한 마디 일러 보십시오.”라고 응수하였다. 백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위하여 말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내 후손이 끊어질까 두렵다.(我不辭向汝道 恐己後喪我兒孫)” [백장이 능수능란하지 않은가? ‘나도 못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멋있게 답했다. 이것이 일문일답이다.]
- 하권 본문 91쪽
대의동북각 소의승당후(大宜東北角 小宜僧堂後), ‘큰일은 동북쪽 모퉁이고, 작은 일은 승당의 뒤쪽이다.’ 각(角)은 모퉁이를 뜻한다. 옛날에는 화장실이 냄새 나는 곳이었으므로, 멀리 있을수록 좋았다. 그래서 대개 승당의 모퉁이 쪽에 화장실이 있었다. 큰일을 보려거든 동북쪽에 있는 화장실로 가고, 작은 일이라면 멀리 갈 필요 없이 가까운 후원 뒤쪽으로 가서 해결하라고 한 것이다. 조주는 대의(大宜, 마땅히 해야 할 큰일)냐 소의(小宜, 작은 일)냐를 묻고, 학승은 대의(大疑)라고 대답하였다. 조주와 학승은 서로 다른 뜻으로 말하였는데, 조주는 그것을 슬쩍 에둘러서 말한 것뿐이다. 그러나 의심에는 크고 작음이 있을 수 없다.
- 하권 본문 134~135쪽
하불기대화상(何不祇對和尙), ‘어찌 스님께 대답하지 않느냐?’ 스님은 상당하여 “누군가 내 말에 답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서 말해 보라. 질문에 대한 답을 하되 측량(測量)하는 마음[분별심으로 도량(度量)해 보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 한다. 이때 한 수좌가 벌떡 일어나 시자를 툭 치면서 “야! 너 왜 대답 안 해?” 한다. 이 수좌의 동작에 조주는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분명 이 수좌가 무엇인가 일을 낼 것임을 간파한 조주가 먼저 철수해 버렸다.] 나중에 시자가 궁금하여 스님에게 물었다. “그 스님은 알고 있습니까?” 이때 조주 스님이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좌저견립저 입저견좌저(坐底見立底 立底見坐底), ‘앉아서는 서 있는 자를 보고, 서서는 앉아 있는 자를 본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대면하여 낱낱이 그 얼굴을 드러내 보고 있다.] 이 말은 이미 알아 버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옳다거나 그르다는 경지를 떠났다는 뜻이다. 언구가 필요 없고,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문제 되지 않는다.
- 하권 본문 160쪽
‘만 리를 가도록 여관이 없다.’는 말은 ‘제가 이제 마음속에 일체의 번뇌가 끊어졌습니다.’라는 뜻이다. 고요 적적한 선정의 경계를 물은 것이다. 그러나 조주는 한 수를 더했다. ‘선원에서 자라.’고 한다. 선원이야말로 선정을 닦는 데 가장 좋은 곳이다. 만 리를 가도록 점포 하나 없다면 그것은 무인지경이다. 무인지경이라면 아공(我空), 법공(法空)이 모두 사라진 경계다. [참선하는 사람이 오매일여(悟昧一如)의 경계에서만 가능한 삼마지(三摩地)를 닦는 데는 당연히 선원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한 말이다.]
- 하권 본문 206쪽
맥직거(驀直去), ‘똑바로 가시오.’ (……) 길을 따라 똑바로 가라는 뜻이 아니다. ‘오직 바른 길을 가라.’는 직심을 말한 것이다. 노파는 ‘똑바로 가라. 수행자는 오직 바른길 가는 그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말했다. 노파는 바로 이 점을 노리고 길을 물으면 언제나 똑같은 말로 일렀다. 그래서 오대산으로 가는 길로 바로 가고 있는데도 일갈한다. ‘또 저렇게 가는군.’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말이다. 잘못 간다는 것은 걷는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선 공부 좀 한다는 스님이라면 내 말에 보답(대구(對句))은 좀 하여야 할 것 아닌가?’라는 뜻이다.] 저 멍텅구리 같은 스님이라는 말까지는 못하고, ‘또 저렇게 간다.’고 한탄한다.
- 하권 본문 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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