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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의 식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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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의 식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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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7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468쪽 | 570g | 128*188*30mm
ISBN13 9788994963075
ISBN10 8994963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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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철학과 식물학
포르투갈 외교관을 지내기도 한 호세 코레이아 다 세라의 글에 등장하는 ‘식물철학자’라는 표현은 무슨 의미일까? 그는 1811년 발표한 외배유外胚乳에 관한 논문에서 “식물철학자들은 식물의 생애에서 종자 부위가 맡은 역할에 대해 같은 의견을 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p.22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 서문에 역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으면서 베이컨이 사용한 것과 별 차이가 없는 나무의 비유를 들었다. “따라서 철학은 전체적으로 한 그루의 나무와도 같다. 뿌리는 형이상학, 밑동은 물리학, 밑동에서부터 뻗어 나온 가지들은 여타의 모든 학문들이다. 이 학문들은 크게 세 가지 주요 학문, 즉 의학, 역학, 윤리학으로 귀착된다.”--- p.28

데카르트는 저서마다 그 점을 분명히 하면서 지식의 체계와 분류, 즉 전체가 모여 철학을 이루고 그 중간에 물리학이 자리한 형태에 대해 거듭 이야기했다. 여기서 물리학은 《철학의 원리》 서문에 명시되어 있듯 우주의 구성만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동물과 인간의 본성은 물론 ‘식물의 본성’까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나무에 관한 지식이 지식의 나무에서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나무에 관한 지식이 차지하고 있는 이 자리는 물리학의 일부에 해당하며, 물리학의 자리는 또다시 철학에 속한다.--- p.30

식물 애호가는 엄밀한 의미의 식물학과는 무관하게 식물이 지닌 약효 등으로 인해 식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을 말한다. 엄밀한 의미의 식물학자는 다시금 채집자와 방법론자로 나뉜다. 방법론자에는 철학자, 분류학자, 명명학자가 포함된다. 식물 분류학자는 식물을 분류하는 일에 종사하고, 식물 명명학자는 식물의 명칭에 관해 연구한다. 그리고 식물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식물철학자는 웅변가, 논쟁가, 생리학자, 제정자와 같은 사람으로, 식물학을 합리적 원칙에서부터 출발해 학문의 형태로 환원했다.”--- p.32

02 식물학사의 윤곽
식물학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독일 식물학자 율리우스 폰 작스(1832~1897)가 내놓은 것이다. 1872년에 발표했는데 지금까지도 참고할 만하므로 작스의 식물학사는 기념비적인 역사 기록에 속한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 1981년 출간된 앨런 길버트 모턴의 《식물학의 역사》는 자료를 기초로 한 정확한 책이다. 최근에 나온 조엘 마냉 공즈의 식물학사는 명확하면서도 삽화를 포함한다는 특징을 지녔으며, 실질적 개론서로서 종합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물론 식물학사는 생물을 연구하는 학문과 일반적인 학문의 역사에서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게다가 특정한 시기, 국가, 주제, 저자에 관한 뛰어난 연구들도 많다. 프란스 스타플뢰와 리처드 코완의 《분류학 문헌 연구》 개정판은 식물학자와 역사학자에게는 참고문헌을 검색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준다 --- p.51

인쇄술은 책을 여러 부씩 찍어낼 수 있게 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의 보급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관찰 중인 표본을 다른 사람이 설명하거나 그림으로 그린 것과 비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식물을 말려서 모아놓은 초기 표본집들은 다루기 쉽고 여러 권으로 늘릴 수도 있는 그림책, 즉 식물도감으로 바뀌었고, 이 ‘종이로 된 정원’은 살아 있는 정원에 없어서는 안 될 보완물이자 식물학자들의 필수적인 작업 도구가 되었다. 식물도감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루카 기니(1490~1556)로 알려져 있다.--- p.67

생식 문제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영양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얀 밥티스타 반 헬몬트(1577~1644)의 선구적인 실험이 자주 언급된다. 헬몬트는 화분에 버드나무를 심고 물을 주면서 키웠다. 5년 뒤 버드나무는 자라서 무게가 늘어났는데, 흙은 아주 조금만 줄어들어서 줄어든 흙의 무게로는 늘어난 나무의 무게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헬몬트는 물을 주었기 때문에 버드나무의 무게가 늘어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런데 이 대단한 실험에서 놓친 요소가 있었는데, 식물과 공기 사이에 기체교환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p.81

03 명명법과 합의
“언어는 인간 정신의 가장 훌륭한 거울이다.” 라이프니츠의 이 말에 많은 철학자들도 동의할 것이다. 《신인간오성론》의 저자 라이프니츠는 ‘문헌학’의 유용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와 같은 말을 했다. 또한 그는 ‘세계 모든 언어’를 위한 문법과 사전이 만들어질 것까지 예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 사물의 명칭은 (여러 민족들의 식물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대개 그 특성에 부합하는 만큼 그 문법과 사전은 사물에 관한 지식을 위해 요긴하게 쓰일 것이며, 인간 정신과 놀랍도록 다채로운 인간 정신의 활동에 대한 지식을 위해서도 쓰일 것이다.”--- p.103

투르느포르는 “같은 속에 속하는 종들 사이에 요구되는 유사성”은 “모든 사물의 창조자”가 식물 자체에 해놓은 “표시”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 창조자가 “우리에게 식물에 이름을 붙일 권한을 주었다”고 말했다. 식물의 종류는 신의 섭리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 해도 그 명칭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영역에 속한다는 뜻이다. 지금 백리향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식물이 박하라고 불렸을 수도 있고, 바꽃이라는 이름의 식물이 미나리아재비라는 이름을 지녔을 수도 있다. 투르느포르가 명칭에 대해 분석할 때 사용한 것이 바로 미나리아재비다.--- p.107

린네는 속명을 위한 규칙을 정할 때만큼이나 정성을 기울여서 오늘날 식물학자들이 ‘기상記相’이라고 부르는 문장형 명칭의 구성과 형식, 길이까지 체계화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두 단어로만 이루어진 이명식 명칭에 명명자의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도입한 뒤, 일상적으로 쓰는 명칭이라는 뜻에서 ‘실용명’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식물철학》 8장에서 반 페이지에 걸쳐 나온다.--- p.112

휴얼은 … “새로운 명칭 체계를 도입하는 권한은 위대한 발견자에게만 인정된다. 국가 최고 권력 기관만이 새로운 화폐를 유통시킬 권한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화폐와의 비교는 존 스튜어트 밀의 《논리학 체계》에서도 볼 수 있다. “단어는 화폐와도 같아서 처음에 아무리 잘 만들어졌더라도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옮겨가는 동안 닳아서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어만 습관처럼 사용할 게 아니라 그 단어가 가리키는 현상 자체를 늘 생각하여 화폐에 각인을 찍듯 단어의 의미가 다시 뚜렷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p.151

식물학자들은 명칭의 문제에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고찰을 발전시켜왔고, 그 가운데 언어 철학의 주요 주제 가운데 몇 가지가 재발견되었다. 플라톤의 《크라틸루스》는 이 문제에 대해 기준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이 레키의 저서에는 명시적으로, 그리고 다른 학자들의 저서에는 재발견되거나 암시적으로 담겨 있다. 크라틸루스처럼 단어와 단어가 가리키는 실물 사이의 유사성을 인정하기보다 헤르모게네스처럼 언어의 합의적 특징을 강조하는 경향이 더 많은 식물학 이론가들은 언어 기호의 자의성과 유연성 사이에서 영리한 중재를 선택한 소크라테스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처럼 단어의 지식을 사물의 지식에 종속시키는데, 이는 분류법과 분류법의 용도에 관한 고찰로 이어진다.--- p.157

04 분류: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사이
1682년 존 레이는 《식물 신분류법》 서문에서 분류법의 유용성을 강조하면서도 어려움과 한계를 지적했다. “그러나 나는 독자들이 완벽하거나 철저한 무언가를, 즉 그 어떤 식물도 예외적이거나 특이한 경우로 남겨두지 않고 모든 식물을 아주 정확하게 구분해주는 무언가를, 다시 말해 그 어떤 종도 소속이 없거나 여러 소속을 갖도록 하지 않으면서 각각의 속을 그 고유 특징을 통해 정의해주는 무언가를 기대하게끔 하고 싶지는 않다. 실제로 자연은 (흔히들 말하듯) 갑작스럽게 비약하지 않으며, 반드시 중간을 거쳐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으로 옮겨간다.” 다시 말해 완벽한 식물분류법, 즉 논리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동시에 식물의 특징 또한 하나도 빠짐없이 반영하고 있는 분류법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p.165

아당송은 1763년 《식물의 과》에서 라이프니츠를 언급했는데,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부르크하르트가 ‘식물의 성에 기초한’ 분류법에 대한 생각을 처음 내놓았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긴 것은 린네였다는 점은 인정한다. 실제로 린네는 1735년 《자연의 체계》 초판에서 식물의 생식기관만을 고려해 강을 정의한 바 있다.--- p.170

수술이 하나만 있는 강은 1수술식물이라 불렀는데, 꽃가루를 지닌 수술을 수생식기관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편이 한 명 있음을 의미하는 일부제一夫制에서 따온 용어다. … 제21강과 제22강은 수술과 암술이 한 그루나 다른 그루에 있으면서 서로 다른 꽃에 있는 식물이다. 이는 부부가 한 집에 살거나 다른 집에 살면서 침대를 따로 쓰는 경우와 같았고, 그래서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를 이용해서 각각 자웅동주(암수한그루), 자웅이주(암수딴그루)라고 칭한다. … 마지막 제24강은 수술이나 암술을 볼 수 없는 은화식물(민종자식물)로, ‘은화隱花’라는 명칭에는 혼인이 비밀리에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pp.170~171

식물 이론가들과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려 했던 철학자들은 몇 가지 중요한 인식론적 문제들을 고찰하면서 식물을 분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모색하고 편리함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 지식을 고려해야 하는지 토론했다. 그런데 이것으로 분류학에 관한 논의가 끝난 것은 아니다. 구조 및 기능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이 논의는 진화 이론에 의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p.197

05 목적, 형태, 기형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토템 동물에 대해 얘기하며 말했던 것처럼, 열매는 ‘먹기 좋은’ 것이기에 앞서 ‘사유하기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그 증거에 해당하는데, 헤겔은 ‘철학적 체계의 다양성’이 ‘참과 거짓’의 대립으로 축소되지는 않지만 ‘진리의 점진적 발전’을 가져온다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철학적 체계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봉오리, 꽃, 열매가 잇달아 나타나는 것에 비유한다. “봉오리는 꽃이 피면 사라지는데, 이는 꽃이 봉오리를 반박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매가 나타나면 꽃은 거짓 실체였던 것으로 선언되고 꽃 대신 열매가 식물의 진리로 들어선다.”--- p.201

투르느포르가 말한 ‘꽃 본연의 의무’, 바양이 말한 꽃의 부위들의 ‘용도’, 린네가 말한 생물의 ‘목적’인 생식, 이 모두에는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이 자리해 있다. 이처럼 합목적성은 생명과학을 정립하는 데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는 1790년에 그러한 생각을 표현했다. “주지하다시피 식물과 동물을 해부해서 그 구조를 연구하고 이런저런 부위들이 어떤 이유와 목적에서 존재하는지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 그런 피조물에는 ‘쓸데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준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정하며, 또한 이 준칙에 ‘우연히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일반적인 자연과학의 원칙과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다.--- p.206

현재 알려진 식물 성장 모델은 유사한 물리 현상에 대한 실험에 따른 것이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것이든 간에, 엽서학의 선구자들과 앨런 튜링이나 달시 톰슨이 제시한 관점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이 분야에서 중요한 책으로 꼽히는 《식물의 알고리듬적 미美》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의 식물 성장 모델에는 미적인 관점도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식물의 아름다움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꽃의 아름다움을 기능적 측면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다윈의 시도를 연상시킨다.--- p.218

06 진화에 사로잡힌 식물학
쥐시외는 그 식물이 아메리카나 동인도제도를 다녀온 사람들이 가져온 것과 비슷한 고사리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쥐시외로부터 한 세기 뒤, 아돌프 브롱냐르는 1718년 쥐시외의 논문이 기여한 바를 다음처럼 요약한다. “앙투안 드 쥐시외는 탄광에서 발견된 식물이 우리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과는 다르면서도 적도 지역의 식물과는 유사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주목하게 해준 사람이다.”--- p.246

사포르타와 동시대 인물로서 그를 높이 평가했던 영국의 고식물학자 윌리엄 윌리엄슨은 자서전에서 의미심장한 일화를 들려준다. 영국과학진흥협회 답사 중에 화석림化石林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지역의 목사가 지질학에서 식물에 부여한 나이가 성서의 연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었다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 증언인데, 진화론의 기본서에 비추어보면 진화라는 현상이 식물과 동물에 똑같이 적용되는 게 분명해 보인다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진화에 대한 일부 종교계의 비판은 데이지의 조상이 목련이라는 설보다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설을 겨냥한 것이었다.--- p.252

07 식물, 공간, 시간
식물은 이른바 환경윤리 안에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식물의 가치에 관한 최근 논쟁은 뜻밖에도 존 스튜어트 밀과 오귀스트 콩트의 대립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카트린 라레르가 이러한 관점에서 두 철학자의 입장을 요약하고 분석했다. 1851년 콩트는《실증정치학 체계Systeme de politique positive》에서 식물계는 언젠가 인간에게 유용한 식물로 축소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러한 가망성에 대해 우려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렇게 축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15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스튜어트 밀은 지식의 진보와 더불어 인간에게 중요한 속성을 지닌 것으로 밝혀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나쁜 식물은 없다면서 콩트를 반박한다.--- p.280

08 식물학의 주관성
소설가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1846년 출간한 단편소설 《오뱅 신부Abbe Aubain》에서 반어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박식한 젊은 신부神父가 몽상적인 성격의 외로운 귀부인에게 식물학의 기초를 가르쳐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귀부인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쓴다. … 귀부인은 공개적으로 혼인하는 현화식물과 ‘비밀리에 혼인하는’ 은화식물의 차이를 친구에게 알려준 뒤 불쾌한 척하면서도 내심 흥미로워하며 이렇게 말을 맺는다. “하나같이 정말 낯 뜨거워.”--- p.291

꽃의 사례를 내세워 혼인 규범의 절대성을 부인하다 보면 근친상간을 금하는 규범을 재검토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에서 한 인물의 입을 빌어 남매간의 혼인을 옹호한다. “백합을 보십시오. 남편과 아내가 한 꽃자루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둘을 낳아준 꽃이 다시 둘을 결합시키지 않나요? 더구나 백합은 순결의 상징 아닙니까? 그래서 그 남매간의 결합이 열매를 맺지 못하던가요?”--- p.293

09 흑고니와 늘푸른참나무
흑고니는 논리학 서적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흑고니가 있다는 사실은 그전까지 유럽 관찰자의 관점에서 검증된 명제로 여겨졌던 ‘모든 고니는 흰색이다’라는 명제를 반박하면서 귀납법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 버트런드 러셀은 약간 다른 관점을 취한다. 아주 많은 수의 흰 고니를 본 사람이 관찰로부터 모든 고니가 흰색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확률론적 귀납법을 설명한 뒤, “많은 동물의 경우 색깔은 매우 가변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색깔을 근거로 한 귀납법은 특히 오류에 이르기 쉽다”고 인정했다.--- p.315

낙엽수와 상록수라는 특징을 염두에 두면 고니의 예와 논리적으로 유사하면서 속과 종의 개념을 고려하게 해주는 사례를 찾아낼 수 있다. 북유럽 사람들은 참나무는 당연히 낙엽수라 생각했고 ‘모든 참나무는 겨울에 잎이 진다’라는 명제를 틀림없는 참이라고 여겼다. … ‘모든 참나무는 겨울에 잎이 진다’라는 명제는 참이 아닌 것이 된다. … 늘푸른참나무의 사례는 낙엽수든 상록수든 관계없이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는 모두 같은 속으로 묶는다는 전제, 즉 잎의 특성보다는 열매의 특징이 더 큰 비중을 갖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p.320

10 식물학적 방법으로 분류하기
소바주는 《잎에 따른 식물분류법》에서 린네의 생각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 분류법을 내놓은 바 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듯 의사로서 질병의 분류법에도 기여했다. 1970년 프랑수아 다고네는 《생명의 목록Le Catalogue de la vie》에서 소바주를 비중 있게 다뤘다. 같은 해 〈메디컬 히스토리〉 지에는 소바주가 질병분류학에 기여한 바를 분석한 논문이 실렸다.--- p.345

식물학자 조지 벤담은 1823년 출간한 책에서 식물의 분류와 학문의 분류를 비교한 내용을 간략히 제시했는데, 이는 자신의 삼촌 제러미 벤담의 《크레스토마티아》에서 발췌한 것이다. ‘크레스토마티아’라는 용어는 팬옵티콘을 고안한 제러미 벤담이 만들어낸 수많은 신조어 가운데 하나로, ‘유용한 지식을 배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그리고 이러한 체계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갈래식 분류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앞에서 라마르크와 캉돌이 《프랑스 식물지》에서 사용한 분류법에 대해 얘기하며 언급했던 이분법적 방식에 해당한다.--- p.350

식물군락에서부터 질병, 인간의 지식, 예술 작품, 민담, 언어, 감정에 이르는 모두가 ‘식물학적 방법으로’ 분류하려 했던 대상이다. 이 목록이 전부는 아니며, 다른 예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보기로 사용된 식물학의 분류법은 단순한 수사적 사용이 아니라면 개발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고, 혼란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러한 적용이 한계와 모순에 부딪친 경우도 성공을 거둔 경우만큼이나 교훈을 준다. 요컨대 여기에서 말하는 본보기는 모방해야 할 본보기가 아니라 관찰하고 증명하고 분석해야 할 본보기다. 식물학의 분류법과 여타 분류법 사이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분류할 대상이 지닌 성질의 차이에 기인한다. 식물학이 만들어낸 분류학적 도구의 올바른 사용은 그 도구를 적용할 실체의 성질에 달려 있으며, 실체의 성질을 중시하는 것이 바로 식물학자의 방식, more botanico다.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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