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리시 Best 시리즈 - 잉글리시, 징글리시?
--- 정민경 (bennys@yes24.com)
'금연' '운동' '다이어트'와 함께 새해 결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영어 공부'이다. 나도 며칠전 지난 수첩들을 정리하다 "영어공부하기 (학원? 책?)" 이라고 써놓은 것을 수첩마다 발견하고 웃은 적이 있다. 고민과 결심은 매번 해왔건만 아직인가 싶어서 조금은 허탈하기도 했다. 주변에도 이럴 바에야 어학연수라도 가서(내가 아니면 아이라도) 찝찝한 영어 걱정에서 벗어나겠다는 사람이 자주 보이는 것을 보니 영어는 여전히 딱히 이유를 짚어 낼 수 없는 마음의 짐인가 보다.
그래도 최근에는 영어가 해묵은 '징글리시' 로 추락하는 것을 피해 보려는 듯이 새로운 스타일의 책이 많이 나오고 있어 반갑다. 장정도 다양화되고 책 속 편집도 과거 수험서 스타일을 탈피, 볼거리가 많게 변하고 있다. 무릇 공부는 두꺼운 책으로 해야 된다는 정통파 학습자에게서는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나는 어려운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당의정' 정도로 고맙게 생각한다.
몇 년 전 출간되었던 <펀글리시 Best 시리즈>는 이런 면에서 여러 가지로 다시 살펴볼 점이 많은 기획이다. 온라인 학습 사이트 펀글리시의 강좌 내용을 책으로 엮은 이 시리즈는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온라인 컨텐츠를 이용한 출판의 선구격으로 볼 수 있다. (웹사이트나 어학 커뮤니티의 컨텐츠로 만든 책이 주목 받는 이유는 우선 웹 기반 학습자들의 날카로운 평가를 통과한 검증된 내용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아직까지는 GVA 등 각종 플러그인 사용이 어렵거나 거부감을 가진 독자들이 많아 책 쪽이 훨씬 접근이 용이하기도 하다)
이 시리즈의 가장 참신한 점은 영어 교재의 단골메뉴가 아닌 틈새 컨텐츠를 골랐다는 것이다. 『한방에 끝내는 원 샷 영어』는 'I mean it', 'it depends' 같이 아주 짧은 표현을 모은 것이다. 원어민은 감탄사처럼 무의식 중에 쓰는 말이고 타이밍에 맞게 바로 치고 나오면 '아 정말 영어 잘하는구나'라는 인상을 주는 말이라 알아두면 꽤 쏠쏠하게 쓸 수 있다. 『말투체험 극과 극』에서는 같은 뜻을 정중한 말투(polite), 보통 말투(casual), 편한 말투(intimate), 막가는 말투(slangy) 네 가지로 보여준다.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나서 "저, 그 영화에 아주 실망했어요" 라고 하는 것과 "젠장, 완전 돈 낭비네"라고 하는 것은 천지차이(우리에게는 인간성과 별개로 영어 실력과도 상관이 있는 문제이다). 미국식 육두문자가 들어가는 막가는 말투(slangy)를 쓸 일이 없다 하더라도, 여러가지 말투를 비교할 수 있으면 당연히 상대방에 따른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므로 꼭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드라마처럼 상황을 만들고 고정 캐릭터를 등장시켜 지루함을 없앤 설명 방법도 눈에 띈다. 비즈니스 영어를 다룬 『이상한 나라의 엄대리』에는 TOEIC 점수 450의 말단대리 엄대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인간성은 끝내주지만 매사 덤벙대는 그가 졸지에 미국 출장을 가게 되고, 회사 영어통인 Lynn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설정 아래 미국 현지 필수 영어 표현을 정리하게끔 구성되었다. 영어 매너를 다룬 『매너 짱 매너 황』에도 매너라고는 전혀 모르는 황당한씨와 흠잡을 데 없는 매너맨 장한름씨가 등장해 예의를 갖춘 영어표현을 전수한다. 각 대화마다 에피소드가 있고, 익숙한 등장 인물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매회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잘된 예와 틀린 예를 쌍으로 보여주는 것도 '비교' 방식을 취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모범 대화만 제시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설명하는게 아니라, 우선 잘못된 대화를 보여주고, 이를 바로잡은 매끄러운 대화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가 『매너 짱 매너 황』. 먼저 주인공 황당한씨의 무례한 대화가 나온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Which floor are you going to?'라는 질문이 오면 무뚝뚝하게 'Five'라 하는 게 다이고, 식사 후에 음식값을 나눠 내자 하니 'No, I pay'라고 한다(계속 내겠다고 하면 한대 맞을 것 같다). 황당한씨의 대화를 읽다 보면 아슬아슬한 기분에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문제는 나도 급할 때는 다 써본 표현이라는 것. 다소 괴로워 하면서 심한 표현을 말끔히 가지쳐 낸 장한름씨의 답변으로 건너가면 우습지만 모범 답변 쪽에 동일시가 되면서 성취감이 느껴진다. (나는 이것을 '신데렐라 효과'라고 부른다).『깃털처럼 가벼운 E메일 영작』도 민수의 이메일과 Kelly의 이메일을 비교해 가며 영작의 기본 원리를 알려준다. 전체적 구성은 '안부' '늦은 답장' '새해인사' 등으로 나뉘어 그 옛날 '해외펜팔' 책과 똑같지만, 본문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틀리기 쉬운 부분을 지적해 주므로 간단한 영작 연습까지 가능하다.
신선한 내용과 접근 방식과 더불어 이 시리즈의 가장 놀라운 점은 바로 크기이다. 14x18cm 정도에 무게 220g, 다섯 권 모두 150페이지 안팎이다.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자투리 시간에 읽고 끝내기에 딱 좋은 사이즈이다. 여행 영어책을 제외한 일반적인 영어책의 기준에 비해서는 페이지수가 많이 부족하지만, 글자크기를 줄이고 편집 레이아웃에 신경을 써서 빈 듯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테이프가 없다는 점. 소설책처럼 읽고 끝내라는 의도였겠지만 기본 대화만이라도 녹음한 테이프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수능시험을 위해서, 또 취직시험을 위해서 영어를 실컷 공부한 다음에는 100미터 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영어책을 던져 버리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해야지'하는 마음은 있어도 당장 절박하지 않으면 쉽게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럴 때는 이 시리즈처럼 재미있는 영어책으로 준비 운동을 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어려운 어휘나 문법은 당장 늘지 않더라도 언어가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게 해주는 책, 읽고 나면 외국인과 대화를 해보고 싶고 영화나 시트콤도 하나 빌려보고 싶어지는 그런 책이기에 영어 공부의 방향을 새로 잡을 수 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