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을 했으면 어떻게든 좋은 결정으로 만들어 가는 것도 나의 몫이지. 세상의 셈보다 나와의 약속을 우선하면 후회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보니 역시 내가 가장 행복하단 것을 알게 됐다. 또 그렇게 지어진 집 덕분에 해가 다르게 크는 딸아이와 매해 여름을 제주 집에서 보낼 수 있었다.
--- p.23, 「서울 반 제주 반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중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가르쳐 주지만 육신으로 노는 원초적인 건강함은 아이에게 배운 것이다. 눈앞에 파도가 일렁일 때, 소금기를 씻어낼 일이나 갈아입을 옷도 없이 젖어버린 후의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겁 없이 성큼성큼 바다에 들어가 버리는 것, 모래를 주물주물 만지고 젖은 머리로 모래밭에 확 드러누워 버리는 것. 선크림을 발랐네 안발랐네, 자외선 차단지수가 얼마네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햇볕에 민낯을 드러내는 건강함과 통쾌함
--- p.39, 「이도저도 아닌 계절에서 서성이지 말고」중에서
시간 약속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내일, 같은 바다에서 만난다. 만나도 그만, 못만나도 그만이란 듯이 “내일도 바다에서 만나!” 라고 소리치고 각자 집으로 떠나는 느슨한 약속이 좋아서 혼자서 몇 번 되뇌었다. 구속력 없는 약속이지만 내일도 여기에 친구가 있을거란 믿음이 생기는 우리의 바다 약속. 여기 이 바다에서 또 만나.
--- p.45, 「여기 이 바다에서 또 만나」중에서
수령이 오래된 큰 나무 아래 서면 나의 보잘것없음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승복하게 된다. 짊어진 온갖 고민이 자잘하고 하찮게 느껴지고, 나도 모르게 이 사람 저 사람과 비교하던 마음도 시시해진다. 모두 자기가 잘났다고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너나 나나 수백 년 된 나무 앞에 보잘 것 없기는 매한가지란 생각이 든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란 걸 깨닫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이 지금보다 나은 인간으로 가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 p.140, 「비 오는 날의 비자림」중에서
삶은 진공상태도, 멸균실도 아니어서 부모가 아무리 울타리가 되어주려 해도 살면서 좀 앓게 될 것이다. 사람에 앓고, 일에 치이고, 마음이 오염될 텐데. 큰 숲이나 바다에 기대는 것도 좋겠지.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사람보다 넓은 품으로 있으니까.
--- p.173, 「숲과 바다를 뒷배로 삼으렴」중에서
자기 가방을 짊어지는 게 사는 연습의 일환이라 생각한다. 자기 짐을 남에게 미룰 순 없지. 내가 들어주고 싶어도, 축 처진 가방을 짊어진 게 안쓰러워 보여도 자기 짐은 어차피 자기가 드는 것이다.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 불필요한 짐을 빼는 결단, 자기가 선택한 것은 책임지고 데리고 가는 것. 우리는 여행을 통해 짊어질 수 있는 만큼만 챙기는 것과 자기 짐은 자기가 드는 연습을 한다.
--- p.225, 「자기 짐은 자기가 드는 연습」중에서
나는 여전히 매해 여름마다 짐을 꾸려서 딸과 여행을 떠나는 유난을 떤다. 여름이면 자연스럽게 제주로 떠나는 유난, 하루에 두 번씩 바다에 빠지는 유난. 비오는 숲을 걷는 유난, 습지에서 한나절 내내 나비만 관찰하는 유난. 내 딸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기 위해 유난도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다. 조금 다른 방식의 유난일 뿐.
--- p.246, 「다른 방식의 유난」중에서
여름은 어쩐지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다. 이 더위는 내일, 모레, 그 다음 모레까지 이어질 예정이며 언제까지고 이런 날씨가 이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다 8월 중하순에 태풍이 한 번 지나고 나면 끝이 없을 것 같던 무더위도 겨우 한 달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꽃과 단풍을 즐기는 것처럼 여름의 한낮을 즐기는 것도 꽤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 늦여름의 깨달음이다.
--- p.261, 「에필로그, 여름이 다 지나갈 때쯤 깨닫는 사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