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증권의 역사를 알아야 산다
지금부터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반드시 이것 하나만은 염두에 두고 투자를 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로 앞으로 여러 투자자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기초이기도 하다.
빅터 에밀 프랭클Viktor Emil Frankl은 “우리의 비극적인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샘솟을 것이라는 희망에 붙여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찰스 울프 주니어Charles Wolf Jr.는 “과거를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똑같은 오류를 되풀이하고, 과거를 공부하는 사람은 오류에 빠지는 다른 길을 찾아낸다”라고 했다.
그러나 과거를 공부한 사람이 다른 길을 통해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오만 때문이다. 과거사에 대한 지식이 많으니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는 오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재차 오류에 빠져 과거와 같은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것이 많이 안다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오만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우리나라 최초 선물거래의 역사를 공부해 볼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오만과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천 미두취인소 설립 배경
운요호 사건(1875년 9월 20일 또는 강화도 사건)은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수비대와 충돌해 벌어진 전투다. 이 사건을 핑계 삼아,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또는 조일수호회담)을 체결하는 데 따라 일본 군함 천성호가 개항을 물색해 부산과 원산항(동해 영흥만에 있는 항구 도시)을 선택하여 1878년 6월 일본 제일은행이 부산지점을 설치했다.
1년 후인 1879년 5월 일본 공사가 요구한 일본 화폐의 통용과 등대 설치를 허가했다. 인천항은 끝까지 허가를 거절했지만, 1883년 1월 인천항 개항(당시 태극기를 국기로 정함)과 일본 제일은행 그리고 인천 출장소 개설로 인천항에는 많은 외국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1886년 5월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으로 프랑스 선교사들 포교의 자유, 1890년 12월 미국과 월미도기지 조차계약 체결 등 그중에서도 특히 청나라와 일본 상인들의 기세가 커졌다. 이에 우리의 민족 상인들도 외국 상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1885년 인천에 최초의 민간상인인 인천객주회仁川客主會를 설립하여 대한제국 고종高宗 33년 1896년 1월 인천객주회에서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로 탈바꿈하였다.
또한, 1897년 서상집徐相潗과 박명규朴明珪 등 한국 최초의 객주단체인 신상협회紳商協會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과 여러 차례 마찰이 있었으나, 1896년 고종은 이들을 보호·육성시키기 위해 앞서 만든 인천객주상회가 모체가 되어 신상협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들 회사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상인에 대한 계몽과 국가재원을 부유하는 데 있어 객주의 영업세를 정부 대신 징수하는 특권을 가졌고, 외국 상인으로부터 회원으로 상권을 옹호하고 민족계 상인의 상업 자세 혁신을 추구했다. 이 당시 객주조합은 근대적 상업회의소로 발전해 1905년 인천신상회사는 인천 조선인상업회의소로 이어져 오늘날 인천상공회의소仁川商工會議所(1885년)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인천항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은 조선의 상인들이 설립한 인천객주회와 신상회사 같은 단체 때문에 유통시장에서 자의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이에 맞서 우리나라에 취인소를 설립하기 전,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미두거래소)를 만든 목적으로 조선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설립을 강행했다. 우리나라 땅에 설립된 미두취인소이지만, 조선인이나 조선정부는 설립에 관여하지 못했다. 일본영사관과 일본 상업회의소의 지원을 받은 일본인 미곡상 14명은 자본금 3만 원으로 대한제국이 접어들기 전 1896년 4월 1일, 인천 미두취인소 설립 허가를 받아 잠시 휴업하기도 했지만 1899년 5월 5일 다시 운영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증권거래소인 인천 미두취인소의 모태이다. 미두는 쌀과 콩을 뜻하며, 취인소는 거래하는 장소를 뜻하는 일본식 표현으로 당시 거래 물품은 면화와 명태 그리고 콩도 거래하다가 나중에는 쌀 한 품목만 거래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 상인들이 처음부터 취인소 설립에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미곡米穀의 매집 경쟁에 따른 폐해를 방지하고, 이를 통해 미곡의 수출을 증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라고 말했다. 언뜻 보면 좋은 내용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내용이다. 일본이 우리나라 국민을 위해 가격경쟁 억제와 수출증대로 조선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니 어불성설이다. 일본이 인천객주회仁川客主會와 신상협회紳商協會 설립에 불만이 없었다면 조선경제는 튼튼했다. 다시 말해, 인천 미두거래소는 조선의 쌀값을 안정시키고 품질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으로 설립한 곳이 아니다. 사실상 조선의 쌀과 금을 수탈해 가려는 검은 야욕의 도구에 불과해 오늘날의 경제 저격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증권거래소의 모태라 불리는 인천 미두거래소의 구조와 거래방식은 후일 우리나라 증권거래소 설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져 오늘날까지도 외국에 의해 한국경제가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외국의 검은 야욕에 관해서는 앞으로 차차 살펴보겠다.
?은행과 거래소 설립 목적
일본은 언제부터 어떻게 쌀과 돈(금)을 모아 일본으로 가지고 갔을까? 답은 은행과 거래소 설립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의 모태는 1878년 6월 부산지점에 개설(고종 15년)한 일본 제일국립은행日本第一銀行(현재의 다이이치칸교 은행)이다. 주식회사인 조선은행은 1896년 주식 모집 방법으로 설립해 돈을 합법적으로 모았고, 외국으로 송금도 가능하게 만들어 이후 무역세관에 따라 조선의 돈을 매수해 화폐로 교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