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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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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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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7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302쪽 | 580g | 148*210*30mm
ISBN13 9788993607093
ISBN10 8993607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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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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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바람 소리까지 일었다.
하기야 대숲에서 바람 소리가 일고 있는 것이 굳이 날씨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청명하고 볕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蕭蕭)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가도, 솨아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 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 1권, p.7

종가는 단순히 큰집이라는, 대대로 맏이의 집안이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중의 기쁨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제사 때에 첫번으로 신위(神位)에게 술을 드리는 초헌(初獻)은 말할 것도 없이 언제나 종손이 먼저 드린다.
제사에서의 위치도, 문중의 원로 어른인 문장(門長)은 좌중에 끼어서 있지만 종손은 맨 앞자리 한가운데 혼자 앉는다.
종회(宗會)도,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에 있는 문장의 집에서가 아니라, 종손의 집안 종가에서 열게 되며, 종중(宗中)의 모든 기록 문서는 반드시 종가에 보관하여 대대로 전하게 한다.
그뿐이 아니다.
종회에서의 자리도, 종손이 문장보다 상좌(上座)에 앉는 것이다.
비록 종손이 이제 이십도 채 못된 홍안의 소년이라 할지라도, 백발의 수염을 늘이운 문장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이다.
“종손은 종중의 기둥일세. 우리들은 가지야. 종손은 대대손손 바른 핏줄을 보전하여 우리 가문을 이어가야 하느니.”
문장은 어린 종손에게 몇 번이고 이른다. --- 1권, p.89

작년부터 시작한 일이 해가 바뀌어 순종 임금 융희 5년, 경술(庚戌), 서력으로 1910년 여름. 공사가 막바지를 향하여 치달을 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청천벽력, 천만 뜻밖에도, 팔월 스무아흐렛날,
“조선은 망하였다.”
했다. ‘한일합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미처 실감도 하기 전에 매안의 저수지가 완성되었다.
오랜 공사 끝에 숙원하던 저수지를 얻은 매안은, 통곡 소리 진동하는 대신, 거꾸로, 짙푸른 하늘 아래 부시도록 하이얀 열두 발 상모를 태극무늬 물결무늬 휘돌리며, 북 치고, 장구 치고, 꽹매기, 징소리 한바탕 흐드러지게 어울어, 하늘에 정성껏 고사 지내고, 넘치는 기쁨을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내가 망하지 않는 한 결코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비유하자면 나라와 백성의 관계는 콩꼬투리와 콩알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콩껍질이 말라서 비틀어져 시든다 해도, 그 속에 콩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콩은 잠시 어둠 속에 떨어져 새 숨을 기르다가, 다시 싹터 무수한 열매를 조롱조롱 콩밭 가득 맺게 하나니.”
백성이 시퍼렇게 눈 뜨고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남의 나라를, 망하였다, 할 수 있단 말이냐. --- 1권, p.155

감잎 같은 매끄럽고 도톰한 본견과, 풀 먹인 열한새 광목 하얀 호청이 서로 접히고 펼쳐지면서 와스락거린다.
사위가 고요하여, 물 밑바닥처럼 적막한 방안에 홀로 이불 펴는 소리만이 낙엽 소리처럼 부서진다.
뒤안의 감나무 가지에서 때를 맞추어 마른 잎사귀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중 몇 잎은 떨어지는지 마당에 구르는 소리가 떼구르르 난다. 산이 가까운 탓인가. 떡갈나무 잎사귀들, 참나무, 상수리나무 잎사귀들이 서로 사그락거리는 소리도 바로 귀밑에서 들린다.
솨아아.
문득 효원의 귀에 친정 대실의 대바람 소리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성성한 대숲의 대이파리들이 날을 파랗게 세우며 바람을 일으킨다.
아아. --- 1권, p.166

흡월정이란, 음력으로 초열흘부터 보름까지 닷새 동안 달이 만삭처럼 둥그렇게 부풀어오를 때, 갓 떠오르는 달을 맞바라보고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 우주의 음기(陰氣)를 생성해 주는 달의 기운을 몸 속으로 빨아들이는 일을 말했다. 그렇게 하면 여인의 몸에 달의 음기가 흡수되어 혈력이 차 오른다는 것이다. 저 무궁한 우주를 한 점 달에 응축시켜 몸 속으로 흡인하는 힘.
그 혈력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1권, p,242

(물이란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좁은 통에 들어가면 좁아지고 넓은 바다에 쏟으면 넓어진다. 높으면 아래로 떨어지고 낮으면 그 자리에 고인다. 더우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추우면 얼어 버린다. 그릇과 자리와 염량(炎凉)에 따라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순응하지만, 물 자신의 본질은 그대로 있지 않은가.)
모습과 그릇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땅 속으로 스며들어간 물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마는 지하수가 되어 샘물을 이루고, 하늘로 증발한 물은 이윽고 구름이 되어 초목을 적시는 비를 이룬다. 대저 형식에 집착한다는 것이 무엇이랴. 보쳀는 것에 연연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오히려 형식에 본질이 희생을 당하는 것이리라. --- 2권, p.66

(강실아…….)
어찌하여 그 이름은 이다지도 서럽고 눈물겨운가.
가슴의 살 속 가장 그늘진 곳에 가느다란 금실처럼 애잔하게 반짝이는, 보일 듯 말 듯한 그
간절함을 어떻게 차마 말로 할 수 있으리.
그것은 때때로 촛불의 심지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그네의 이름이 떠오르면, 그 이름은 부싯돌같이 순간적인 불꽃을 일으키며 심지에 불을 붙이고 만다.
그것은 강모의 힘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다.
아무리 숨을 깊이 들이마시어 꺼 보려고 하여도 속절없는 일이었으며, 가슴을 오그려 불꽃을 죽여 보려 하여도 허사일 뿐이었다.
살에 박힌 심지는 살을 태우며 속으로 잦아들어간다. --- 2권, p.96

천지에 의지할 곳 없다는 생각이 등골에 사무치며 오르르 몸이 떨렸다. 그 순간 청암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
인력이 지극하면 천재를 면하나니. 이 뼈가 우뚝 서서 뿌리를 뻗으면 기둥인들 되지 못하랴. 무성하게 가지 뻗으면 지붕인들 되지 못하랴.
그네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있는 양자 기채를 서리 맺힌 눈매로 바라보았다. --- 2권, p.237

마치 지하의 뿌리가 캄캄한 어둠 속으로부터 홀로 진한 수액을 빨아 올려 살구나무 가지의 저 먼 끄트머리까지 보내 주듯이, 가지는 천지에 내리는 어스름의 어둠을 온몸으로 빨아들여 지하의 뿌리에게로 내려 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 둥치가 뿌리라면, 거꾸로 뿌리는 나뭇가지일 것이다. --- 4권, p.155
보름날의 보름달은 누가 보아도 이지러진 데 없는 온달이지만, 칠흑 속의 먹장 같은 그믐밤에 그 무슨 달이 뜬다고 온달이라 하는가.
그렇지만 보름의 달은 지상에 뜨는 온달이요, 그믐의 달은 지하에 묻힌 온달이다.
사람의 눈이 무엇이리오.
그 눈에 보이면 있다 하고, 안 보이면 없다 하지만, 푸른 달빛의 눈썹끝도 비치지 않는 어둠이 먹통보다 짙고 검은 밤, 달은 짐작조차 할수 없는 지하에서 저 홀로 만월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 5권, p.158

기응은 연달을 다 깎아 한쪽으로 밀어 놓고, 깨끗한 연종이를 가로 한 번, 또 다시 세로 한 번 접어서, 각이 지게 접혀진 한가운데를 칼로 그린 듯 동그랗게 오려 냈다. 반듯하고 온전했던 하얀 백지는, 그만 한순간에 가슴이 송두리째 빠져 버려 펑 뚫리고 말았다.
종이의 오장(五臟)을 무참하게 도려내 버린 것이라고나 할까.연이야 무슨 생각이 있을까마는, 그렇게 제 가슴을 아프게 도려낸 애를 곱게 곱게 물들이어 이마빼기에 붙이고, 그 어느 연보다 더 휘황한 빛깔로 자태를 자랑하며, 이름까지 지어 받아, 소원을 싣고 악귀를 쫓으면서, 높고 높은 하늘의 먼 곳으로 나는 것이다.
얼마나 서럽고도 아름다운 일이리.
사람도 그러하랴. --- 5권, pp.225~227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세상에 없지. 껍데기만 살었다고 목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살어 있으면서도 죽은 것은 제가 저를 속이는 것이야. 살어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죽어 버린 것이 세상에는 또한 부지기수니라. 어쩌든지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서 목숨을 죽이지 말고 불씨같이 잘 보존허고 있노라면, 그것은 저절로 창성허느니.”
목숨이 혼(魂)이다.
혼이 있어야 목숨이야.
“잘 알겠습니다.”
“어쩌든지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사람의 마음이 곧 목숨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마음을 잃어버리면 한 생애 헛사는 것이야.”
“예.” --- 6권, p.119

“아, 그런데, 스님. 각 존위의 방위 서신 위치가 동·서·남·북이 아니고, 동·남·서·북으로 되어 있습니까?”
“예. 이 세상의 방위를 둥그렇게 본 것입니다. 동·서·남·북이 방위를 서로 반대 개념, 즉 대칭으로 짚은 것이라면 동·남·서·북은 원으로 짚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동·남·서·북으로 방위를 보면 해가 뜬다, 해가 진다, 춥다, 덥다, 밝다, 어둡다, 이런 식으로 분류하고 나누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동·남·서·북 방위는 해뜨는 동쪽에서 출발하여 해가 점점 길고 밝아지는 남쪽으로 이동하고, 다음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갑니다. 그러고 나면 밤이 오지요. 북방입니다. 그리고 북방은 동방과 나란히 있지요. 어둠이 고요히 우주와 만물을 품어 주면 이윽고 해뜨는 아침이 옵니다. 그래서 동·남·서·북으로 이동하는 것은 우주의 자연이 주는 생체 방위의 평화와 순리가 있지요. 우리의 몸에 맞는 방위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이 방위에는, 모든 것이 옆에 있고 동등하며 끝없이 순환하는 평화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방위를 짚는 데도 우주를 짚는 손.
--- 9권,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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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만들기에 대한 최명희의 ‘혼불’ 같은 투신(投身)의 결정이 곧 혼불이다. 그가 묘사한 우리 삶의 진짜배기 원형질이 슬프고 아름답게 차근차근 다가온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의 의식(리추얼)이나 그 사이에 낀 여러 풍속사의 극채색에 가까운 묘사는 놀랍다. 아, 이런 소설도 있구나 싶고 이건 미싱으로 박은 이야기가 아니라 수바늘로 한 땀 한 땀 뜬 ‘이바구’라는 걸 새삼 느낀다.
최일남 (소설가)
최명희는 문체에 관심하는 희유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정겨운 서정성과 예스러운 정취를 지향하는 문장으로 된 『혼불』은
우리말의 보고로서 주술적인 힘과 기운마저 가지고 있다.
우리 겨레의 풀뿌리 숨결과 삶의 결을 드러내는 풍속사이기도 한 이 소설은
소리 내어 읽으면 판소리 가락이 된다.
독특한 울림이 호소력을 발휘하는 노작(勞作)이다.
유종호 (문학평론가)
최명희의 소설을 대하면 어느 벌족한 가문의 종가 댁 잔치마당엘 들어선 것 같은 설레는 기대감과 아련한 흥분을 느끼게 된다. 나는 곧 거기서 울을 넘는 음식 냄새와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 이어 뜨락을 메운 질펀한 흥취와 안방 여인네들의 정겨운 어우러짐, 그리고 사랑채 어른들의 경세담들을 모두 한마당에서 만난다. 고색창연한 그 일문의 내력을 숨기고 있는 뒤꼍 대밭의 은밀스런 속삭임까지도.
이청준 (소설가)
일제식민지의 외래문화를 거부하는 토착적인 서민생활 풍속사가 『혼불』에 이르러 비로소 정확하고 아름답게 형상화된다. 역사의 격심한 갈등과 대변혁 속에서도 의연히 민족혼의 알맹이를 마모시키지 않고 영글 수 있게 만든 것은 옹골찬 여인들의 한 많은 삶이 다져낸 넋의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청암부인을 비롯한 숱한 우리 민족의 어머니와 아내, 여인상을 최명희는 애절함과 그리움으로 우리 시대에 부상시켜 준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최명희는 출중한 ‘이야기꾼’이다. 근대 말과 현대에 걸친 그 아픈 과도기의 구석구석, 바꾸어 말해서 안방, 집안, 고샅에서 사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현장을 바늘귀로 헤집어서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는 그 아린 사연들을 풀이하는 ‘이야기꾼’이다. 이 작가는 장단이며 사설에 걸쳐서 그녀의 고향 남도의 판소리 흥이며 기운을 이야기에 싣는 것을 절묘하게 연행(演行)해 보이고 있다. 전통적 이야기 곧 전통적 서사(敍事)가 오늘의 역사를 만나서 이룩한 최절정이 곧 『혼불』이라고 해도 좋다.
김열규 (문학평론가)
최명희는 원고지 한 칸 한 칸에 글씨를 써넣는 것이 아니라 새겨 넣고 있다. 그의 글씨는 철필이나 만년필로 쓰는 것이 아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든 정신의 끌로 피를 묻혀 가면서 새기는 철저한 기호이다. 『혼불』은 지금 우리 문학에 횡행하는 온갖 소음과 기만을 무섭게 경고한다. 최명희, 그는 분명 신들린 작가이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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