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아는 장차 황제의 자리에 오를 몸이다. 하나뿐인 윙그비아의 정통 후계자였다. 그냥 평범한 일개 시민이었다면 멍청해서 죽든, 덜떨어져서 죽든 알 바가 아니지만, 루아에게는 막중한 사명이 있었다.
이왕 새로운 삶을 얻은 거, 나는 부잣집 딸로 편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 모자란 황제 밑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싶지는 않아. 으응, 절대로!
거울 앞에 똑바로 서서 몇 번이고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이런 내 결심은 루아가 수줍게 내민 직사각형의 작은 함으로 인해 와르르 무너졌다.
“이거 받아.”
백금을 띠처럼 둘러 테두리를 장식한 마호가니 함은 선뜻 가치를 매길 수도 없을 만큼 값비싸 보였다.
이거, 너무, 지나치게 화려한 감이 있는데? 나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로 내가 받아도 괜찮은 거야?”
손을 꼼질거리던 루아가 활짝 웃었다.
“물론이지! 저번 생일날 어머니께 선물받은 거야. 이젠 내 거니까 내가 보니한테 줘도 괜찮아. 그러니까 어서 열어봐, 얼른!”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여니, 안에 들었던 보석이 그제야 온전히 제 모습을 보였다. 세상에, 이거 진짜 예쁘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야명주야. 밤에만 빛나는 보석인데 정말로 예뻐.”
우리밖에 없는데 굳이 소곤거리는 루아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를 간질였다. 나는 마법이 걸린 것도 아니건만 밤하늘에 박힌 별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황금 빛깔의 보석을 뚫어져라 주시하기만 했다.
가까스로 호박빛이 일렁이는 보석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루아를 바라보았다. 꼬물꼬물 손장난을 치는 루아가 지금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웠다. 괜히 소꿉친구는 아니라고, 루아는 내가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나보다 더 잘 알았다.
“이거 진짜로 나한테 주는 거야? 정말?”
황홀경에 빠져 루아를 다그치자, 루아가 눈을 깜박였다.
“응, 보니 네가 기뻐할 것 같았어.”
“당연하지! 너무, 너무, 너무 마음에 들어! 진짜로!”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꺅 소리치며 루아를 덥석 끌어안자 루아가 마냥 순진하게 방긋방긋 웃으며 내 목에 목걸이를 직접 걸어주었다.
나는 답례로 루아의 뺨에 수십 번은 뽀뽀해주었다. 내가 만족스럽게 미소 짓자 루아가 부끄러운 듯 뺨을 빨갛게 물들이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보니랑 정말 잘 어울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사뿐사뿐 걸어 벽면에 걸린 커다란 전신거울을 바라보았다. 딱 귀엽다 싶을 정도로 도톰하게 부푼 산호색 입술을 장난치듯이 오므린 작은 여자아이가 보였다.
길고 매끄러운 연한 딸기색 머리카락이 여자아이의 동그란 얼굴을 덮고 있었는데, 금을 녹여 넣은 듯 반짝이는 눈이 루아가 말했던 대로 펜던트와 몹시 어울렸다. 가늘고, 여리고,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장신구다. 정말로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아, 진짜 세상 살아가는 보람이 있어.
“보니야?”
루아가 여린 꽃사슴 같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몸을 틀어서 루아의 머리를 잠깐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새삼스럽게도 기분이 좋았다.
루아의 이마에 다시 한 번 뽀뽀를 하고 나는 생글생글 웃었다.
“넌 조금 더 커야겠다. 아직 나보다 한참 작잖아.”
“아니거든! 별로 차이 안 나!”
내 장난스러운 투에 루아가 볼을 부풀리며 항의했지만 나는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렇게 강아지처럼 눈만 부릅뜨고 뚱한 채 있으면 더 괴롭히고 싶어진다는 사실을 루아는 영 모르는가 보다. 귀엽기도 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전생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나는 영혼까지 보니 안젤리크 멜론느 그레이스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이 변화가 정말로 싫지 않았다. 새로운 삶이 마음에 들었다. 타인의 것을 훔치지 않고도 화려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역시 루아에게는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