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물어도 돼요?”
미심쩍은 듯이 확인을 하는 이 남자의 소심함이 짜증이 났다.
“물라니까요, 제발. 나 잠 좀 자게 해줘요.”
버럭 소리쳤다. 난 원래 자존심 없는 여자이다.
“자게 해주면 뭐 줄 건데요?”
순간 다시 머리뚜껑이 열리려 했다. 이보셔,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지.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살아야지, 각박하게 꼭 그렇게 굴어야겠어? 물론 아무 말도 못 했다.
“피 마실 거잖아요. 그리고 우리 이웃사촌 아니에요. 이웃사촌이면 서로 좀 친하게 지내야죠.”
어차피 나 매혈해서 자려는 여자야, 두려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아니 그전에 내 모럴은 어디 있냐는 둥 헛소리를 하려거든 당신도 세 달 동안 잠 못 자봐. 나처럼 되지. 내 자신 있게 말하는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성욕도 식욕도 아닌 수면욕이야!
“그건 자본주의 논리에 맞지 않는데요.”
남자가 시큰둥하게 손톱으로 귀를 후비면서 말했다.
“네, 뭐라고요?”
이 뱀파이어가 나에게 자본주의 같은 단어를 꺼냈다. 뱀파이어면 뱀파이어답게 먹이 앞에서 체면을 지키란 말이다, 이 썩을 뱀파이어 놈아. 물론 마음속으로만 욕했다.
“왜 자본주의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건데요?”
마음이 급해진 내가 들이댔다.
“아니, 저는 404호 씨가 원하는 걸 갖고 있어요. 그렇죠? 근데 404호 씨와 서로 물건을 교환할 때 내 물건이 404호 씨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좋으면 이거 등가교환이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
그가 바보 같은 학생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선생님이라도 된 양 아주 상냥한 척 설명해주면서 내 속을 벅벅 긁어 왔다. 뭐라고, 이 써글놈아! 등가교환?
“그래서요? 뭐가 더 필요한데요? 돈이면 돼? 얼마면 되는데?”
이미 눈이 홱까닥 뒤집힌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뭐 그래도 이웃사촌끼리 잘 지내야죠. 일단은 물어드리는 걸로 하지요. 근데 조건이 있어요.”
이 남자 말을 하면 할수록 성격 나쁜 게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또 뭔데?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은 걸 억지로 꾹꾹 눌렀다.
“내가 원하면 그 집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줘요.”
“도어 록 비번은 3912…….”
“그건 이미 아는 거고. 나한테 집에 들어오라고 정식으로 초대해줘요.”
이 새끼, 언제 우리 집 비번까지 알아낸 거야? 그나저나 진짜 뱀파이어는 뱀파이어인 모양이었다. 초대하지 않으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내가 그동안 뱀파이어물 좀 보았지.
“그래요. 그래. 까짓것 그래 우리 집도 당신 집 해요. 계속 잘 들어오십쇼.”
남자가 웃자 짧다고 생각했던 송곳니가 꽤 길게 뻗어 나오는 게 보였다. 지난밤엔 별로 길어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는 적당히 감추었던가 보다. 이 사기꾼 뱀파이어 놈 님 같으니라고!
그렇다 그는 뱀파이어.
나를 잠재워줄 드림 나이트(Dream Knight).
내가 다시 손목을 들이대자 그가 좀 주춤했다.
“아니, 저기 식사하기 전에 예절이란 게 있는데 무턱대고 들이대면 바로 깨무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낭랑 18세야, 내외하게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일단은 참았다. 수틀려서 안 문다고 하면 나는 또 오늘밤도 새하얗게 지새우겠지. 불치병이라는데 평생 잠 못 자겠지.
“씻고 올까요?”
내가 다시 황급히 물었다.
“아니, 그건 괜찮은데 좀 분위기는 내보죠.”
“네?”
남자 입에서 나온 예상 밖의 단어에 나는 그만 놀란 기색을 내비춰 보이고 말았다. 이거에 또 이 섬세한 뱀파이어 양반께선 심기가 좀 상하신 모양이셨다.
“영화에서 뱀파이어가 그냥 처음부터 무는 거 봤어요? 물 만한 분위기를 조성해야 물 마음이라도 생기지. 사람도 밥 먹기 전에 기도라도 하든가 하잖아요.”
지금 그러니까 나이 서른은 넘어 보이는 남자가 ―실제 추정나이는 전혀 모르지만 더 많을 걸로 짐작된다― 분위기를 찾고 앉아 있는 웃기는 상황인 거네.
헛하고 비웃지 않으려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런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그래도 다행히 마음은 바꾸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신 미묘하게 다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똑같은 데 물면 재미없잖아요. 똑같은 피 빠는 것도 지겨운데 무는 자리라도 좀 바꿔보든가 해야지.”
혼자 불평을 늘어놓더니만 크고 하얀 손마디가 긴 아름다운 손이 뼈만 남은 내 어깨를 살짝 잡았다. 내가 놀라 주춤했지만, 그의 긴 손이 흘러내려온 산발이 된 긴 머리카락을 옆으로 슬쩍 넘기까지 했다.
사실 목을 물 거라곤 생각 못 했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체온이 낮은 누군가의 손가락의 냉기가 옷을 뚫고 내 살갗까지 닿았다.
그리고 지난밤의 그것은 단순한 전조였을 뿐이었다.
내 어깨를 틀어쥔 남자의 악력은 의외로 셌다. 마른 체구여서 아랫집 늑대인간처럼 힘이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그리고 그는 내 목을 뚫어져라 보면서 물 곳을 찾는 듯했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건드렸다. 내가 움찔하며 살짝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적재적소의 곳을 찾았는지, 남자가 고개를 천천히 숙여 왔기 때문이다.
그는 방금 전에 그의 손가락으로 만졌던 내 입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살짝 열에 들뜬 입술에 서늘하게 닿은 403호의 입술이 달콤한 연인인 듯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왔다. 그러나 조심스레 접근했던 입술은 순식간에 다시 내 입술을 가르며 침입했다.
차가운 물의 송어처럼 체온이 다른 사람의 살이 나의 입 안을 자유로이 유영하고 있었다.
곧 깊숙이 파고든 그의 혀가 나의 혀를 휘감고 희롱하기 시작했다. 나는 왠지 그가 얄미워져서 살짝 그의 혀를 물었다. 그러자 파닥거리는 생선이라도 되는 듯이 순식간에 온 입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숨쉬기 곤란할 정도의 강렬한 움직임에 흠칫 놀랐지만 이미 어깨가 잡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일단은 어떻게든 이 남자가 나를 물게 만들어야 하니 물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주는 게 좋겠지.’라고, 나는 심지어 자신을 설득하려 하는 중이었다. 헐떡거리는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그의 혀는 내 체온에 맞추어서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행위가 농밀해지면 질수록 그 따뜻한 숨결이 입술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그가 잠시 내가 숨을 쉴 수 있게 입을 떼었을 때 나는 투덜거렸다.
“그래서 언제 물어줄 건데요?”
헐떡거리며 불평하는 내게 그가 답했다.
“난 맛있는 건 가장 마지막에 먹거든요.”
이런, 아뿔싸. 왜 마녀 언니가 그렇게 말렸는지, 그 남자 나쁘다고 말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걸려들었구나. 나는 내 어리석음을 탓했다. 그가 내 입에 대고 후후 웃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곧 차가운 숨결이 내 목을 간질이고 목에 차가운 뭔가가 닿는다.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낯선 사람의 숨. 뱀파이어도 살아 있나 보다, 숨을 쉬는 것을 보니. 그러고 난 뒤 내 목에 살짝 박히는 따끔한 느낌. 송곳니를 박아 넣었나 보다.
송곳니가 들어오는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낯선 이방인의 입술이 내 목을 빨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잠과는 다른 뭔가가 같이 오고 있었다. 몽롱함과 더불어.
뭔가 속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마녀 언니와 늑대 아저씨가 조심하라고 말했던 이유를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뭐야, 이 사기꾼, 이러면서도 나는 잠이 비실비실 찾아온다는 게 너무 좋아서 슬며시 웃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내 목을 핥고 있었다.
그래 너는 핥아라, 나는 자마.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