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바람피워놓고서, 이제 와서 무슨 애정 타령이야. 니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야. 사람을 이런 추잡한 치정에 끌어들여놓고, 이제 와서 사랑이라니. 말만 그럴싸하면 다야. 뭐? 평생의 사람?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정말. 그러고서는 나보고 쿨하지 않냐고? 도대체 뭐가 쿨한 건데.”---p.15
우리의 이별에는 뭔가 정확히 매듭짓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완전히 묶어버리거나 아예 풀어버리거나 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러지 못한 채 3년이 지났고, 그사이 나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그 감정의 실체를 서로 외로웠다고 표현하기로 했다. ---pp.11-12
지금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있다(예전처럼). 또 다시 누군가의 여자를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제 성장했다. 다시 만나더라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게다가 3년이란 시간은 내가 알던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물론 그 이유는 나였다. 나와의 이별 후로 그녀는 달라졌다.---p.42
가난한 자가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잖아요. 그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말했다. ? 그게 뭔데요? ? 술과 잠과 섹스요. 이 세 가지 중에서 두 가지를 즐기고 있는 사람을 무슨 수로 훼방해요. 그건 제 영역이 아니죠. 섹스를 해주지는 못할망정, 술 먹고 자는 사람을 깨워선 안 된다는 게 제 철학이에요. 게다가 소주 먹고 자는 사람은요. 불안했던 아침의 저를 달래주었으니 그 보답으로 추운 길 위에서 현실을 잊고 도진 씨를 달래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어요.---pp.100-101
“다시 안 만날 거면 왜 연락했어! 속은 내가 잘못이지. 난 만나던 남자친구까지 정리했다고. 멍청하게 매일 전화기만 보면서 언제 연락이 오나, 언제 메시지가 오나, 아님 방명록에 글이라도 남기나, 혹시 불쑥 찾아오려고 이러나, 바보같이 기다렸단 말이야. 얼마나 내가 초라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알아? 그럴 거면 왜 그날 집에 데려간 거야! 헤어진 연인이면 언제든지 만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 있는 여자라도 자기 집에 데려가서 맘대로 자고 그래도 되는 거야? 나중엔 내가 만나자고 문자도 보냈잖아”---p.153
데지마 워프라는 곳에선 도착하자마자 바다의 냄새가 풍겼다. 크루즈와 요트가 데크에 정박해있었고, 정박한 배까지 이어진 판자길 위에 하얀 전구들이 박혀 있어 마치 물 위에 빛들이 떠 있는 것 같았다. 만의 건너편 하늘엔 별이 걸려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절벽 위에 버티는 유럽의 고성처럼 어둠 가운데 빛나고 있었다. ---p.131
내일이면 그녀를 만난다. 어쩌면 나는 새로운 날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이미 나의 마음은 그렇게 애원하고 있었다. 곧 이별을 할지도 모를 사람과 당장 첫 섹스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키스조차 않고 잘 순 없었다.---p.122
이제 기나긴 배회를 마치고 마침내 그녀와 내가 같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우리 앞에 남겨진 생의 장면들을 함께 볼 생각이었다. 나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돼버렸지만, 이제 그녀에게로 돌아갈 준비는 되어 있다. 아니, 이렇게 된 이상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고서는 못 견딜 정도가 됐다. ---pp.162-163
결국 그녀가 나에게 원했던 것은 나도 자신처럼 기나긴 감정의 동굴을 헤매는 것일까. 그래서 내가 자신이 상처를 입으며 가까스로 벗어났던 그 동굴 속의 헤맴을 끝내면, 그제야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슬퍼졌다. 더욱 슬픈 것은, 그럼에도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p.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