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력
대규모 전투 경험, 병력 수, 화기 측면에서 볼 때, 조선은 단기전에서 일본군과 전투다운 전투를 치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전투가 조선 땅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장기전에서는 다른 측면이 고려된 전투력이 비교되어야 한다. … 특히 조선군은 임진왜란 초기 두 달간 있었던 대규모 전투 이후 소규모 전투에서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대응하여 일본군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조선군은 백성의 협력을 받아 각종 정보의 우위를 점한 채 전투를 치렀고, 무엇보다도 무기와 병량 보급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 비해 확실한 장점을 보유하였다. 따라서 조선군은 단기적으로 초전의 대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모두 상대방의 장점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까닭에 조선과 일본 모두 비극을 맞게 된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엄청난 군사력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여 초기 대규모 전투에 거의 대응하지 못하였다. 반면, 일본은 조선이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의 후손이며 몽골과 40년 전쟁을 치른 고려의 후예임을 망각한 무지와 오만으로 조선을 침략함에 따라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된다.(1장 임진왜란의 배경)
조선 조정의 대응과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이렇게 일본군이 북진하고 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기본적으로 두 단계의 방어전략을 마련한다. 하나는 경상도 지역 지방수령들과 휘하 병력을 대구로 집결시키고,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한양에서 대구로 파견하여 일본군을 막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충청도 지역 병력을 충주로 집결시켜서 신립으로 하여금 이 병력을 지휘하여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각 지역의 지형지물을 이용, 주요 고갯길에 장수를 파견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 1593년 6월 평양성을 함락시킬 무렵 일본군은 가장 넓게 조선 땅을 점령한 시기였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당시 평양북도 및 함경북도 일부를 제외한 조선의 전 지역을 일본군이 점령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당시 상황을 그린 각종 지도에서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우선 일본군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낙동강 서쪽의 경상우도를 점령한 적이 없다. 그리고 일본군은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주요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 상에 30리(12km)에서 40리(16km) 간격으로 작은 방책을 쌓아 병량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일본군이 한 지역을 점령했다고 해서 그 지역의 농촌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시킨 것은 아닌 것이다. 즉 일본군은 평양 및 함경도 주요 도시까지 진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고 볼 수는 없다.(2장 초기 일본군의 공세)
조선군의 반격과 일본군의 위기감
프로이스의 기록을 볼 때, 임진왜란 전황이 급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백성이 처음에는 일본군을 아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나 복종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하였다. … 또한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일본군에게는 큰 문제와 어려움이 발생했다. 첫째, 일본군은 서로 먼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로를 통해 일본에서 수송되는 식량을 보급 받으려면 많은 병사를 동원해 군수품과 식량을 가지러 가야만 했다. 그런데 각지에서 조선군과의 전투로 보급품을 위해 많은 군대를 동원하기 어려웠다. 또한 긴 보급로에 조선 병사들의 매복으로 일본군이 죽고 군수품이 탈취되었다. 둘째, 일본 수군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에 있는 조선 수군의 자멸에 의해 약탈이 용이했지만, 전라좌·우수영의 적극적인 공세로 해안 고을의 약탈이 불가능해졌고 해로를 통한 보급이 차단당했다. 즉 일본군은 조선군의 매복과 습격 등 공세에 시달려야 했고, 또 보급품과 식량 부족으로 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따라서 7월 말 조선 봉행으로 한양에 도착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이 8월에 한양에서 일본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이 회의에서 조승훈의 명군을 평양성전투에서 물리쳐 사기가 오른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대로 일본군의 발빠른 철수가 단행되지 않았지만, 일본군 진영에서 전쟁 수행이 그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3장 조선군의 반격)
임진왜란부터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1년 2개월 간 일본군 사망자 수
[일본전사]에 참전이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일본군 사망자를 계산해보았을 때 참전 일본군은 전체 22만 4,774명이고, 임진왜란 초기 1년 2개월 만에 10만 586명이 사망 또는 실종, 후송되었다. … 이러한 일본군의 엄청난 사망자 수는 임진왜란의 각종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패퇴했다는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예를 들어, 1592년 4월 14일 부산성전투를 시작으로 승승장구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1번대의 총 병력 수는 1만 8,700명이고 이듬해 3월 한양성으로 후퇴했을 때의 병력 수는 6,626명으로 줄었다. 9개월 동안 1만 2,074명의 병력이 감소했다. 무려 65%가 감소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군 1번대가 패전한 제4차 평양성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2,000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많은 병력이 어디에서 감소한 것일까? 이러한 일본군의 엄청난 사상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이것은 조선군이 각종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고,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부산성전투, 동래성전투, 밀양성전투, 상주전투, 충주 탄금대전투, 3차에 이르는 평양성전투에서 조선군은 비록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필사적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음을 의미한다. 또한 조선군과 백성들이 매복과 기습으로 일본군 1번대의 진출을 끊임없이 저지한 결과다. 이러한 우리 조상들의 노력이 기록되지 않고 그저 패전으로만 알고 있는 우리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되는지를 방증한다.(4장 진주대첩과 그 후의 조선군 공세)
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임진왜란 종료
2차 진주성전투는 조선 관군과 의병 5,800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9만여 명을 상대한 혈전이었다. 전투는 1593년 6월 21일에 시작되어 29일까지 9일간 지속되었다. 21일 첫날은 실질적인 교전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8일 동안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 9만여 명의 병력이 총 25회 이상 진주성을 공격했고, 진주성에 있던 조선 관군과 의병은 29일 마지막 전투에서 동문이 무너지기까지 대단한 결집력을 보이며,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특히 6월 23일, 25∼26일에는 모두 1일당 6~7회의 교전을 모두 버텨냈다. 전투 8일째 되는 날, 성벽이 무너진 까닭에 진주성이 함락된 것이다. 만일 비로 인해 성벽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조선군은 진주성을 더 사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일본군 역시 2차 진주성전투 이후 부산 지역으로 후퇴한 후 병력을 빠르게 일본으로 송환했다. 1596년 1월 유정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그리고 1596년 5월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 지역의 방어용 목책을 불태우고 군대를 철수하였고, 나머지 일본군도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 이로써 임진왜란은 종료됐다. 임진왜란은 공식적으로 1592년 4월에 시작되어 1596년 5월까지 4년 1개월로 기록된다. 하지만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 이후에는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임진왜란은 1592년 4월부터 1593년 6월까지 1년 3개월 동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5장 제2차 진주성전투와 임진왜란의 종료)
왜곡된 역사와 알아야 할 역사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에 대해 조선의 내분과 갈등, 미흡한 전쟁 준비, 국왕을 위시한 조정과 관군의 무능 등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선군이 일본군과의 각종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이순신의 해전과 명군의 원조가 없었다면 조선은 멸망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 책의 집필 계기는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가 편향적으로 기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들을 찾아 본 결과, 당시 우리 조상들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들은 역사 서술에서 빠져 있었고, 일부 역사적 사실을 위주로 꿰어 맞춘 해석을 발견하였다. … 이 책은 객관적인 사료를 중심으로 역사를 재조명하였다. 감추어진 역사적 사실과 알려진 사실을 비교 검토하였고, 일본군 합동참보본부가 1924년 발간한 『일본전사 조선역(日本戰史 朝鮮役)』에서의 임진왜란 기록을 비교하였다. 그리고 일본사에 감춰진 기록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석하였다. 또한 방대한 한국 자료도 인용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근거 및 수치가 확실한 사료만을 인용하였다. … 이순신의 해전은 물론이고, 육지에서 웅치·이치전투, 2차례의 금산성전투, 경주성전투, 영원산성전투, 진주대첩, 4차에 걸친 평양성전투, 북관대첩, 3차례 성주성전투, 독성산성전투, 행주대첩, 제2차 진주성전투 등 우리 조상들의 치열한 분투 노력으로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이다.(6장 알려진 역사, 알아야 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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