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나무와 사람도 그럴 수 있나요?” 작은나무는 진정 궁금하다는 얼굴로 할아버지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럼,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단다. 더구나 오랜 시간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사람들과는 더욱 그렇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정이 있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 우정이 있듯, 나무와 사람 사이에도 그런 우정이 있는 게야.” 할아버지나무는 눈 속에서 가만히 그 사람을 추억했다. --- p.35
***** 어느 해 가을에는 너무도 많은 밤을 발밑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일부러 부엌 바깥으로 와 할아버지나무를 어깨동무하듯 한 팔로 감싸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보게, 친구. 한 해에 다 맺어 떨어뜨릴 게 아니면 너무 무리하지 말게. 자네야말로 오래오래 이곳에 있으면서 이 집을 지켜봐 줘야지. 겨울에 눈 조심, 여름에 바람 조심하고.” 할아버지나무는 그때 처음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은 그냥 나무를 심은 사람이었고, 부엌 바깥의 할아버지나무는 그가 심은 많은 나무 중에 조금은 특별한 나무였을 뿐 서로 말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다른 어떤 것으로 태어나지 않고, 나무로 태어난 것을 행복하게 하는 말이었지. 그리고 지금도 나는 나무인 것이 행복하단다.” 할아버지나무도 지금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때가 있었다. 작은나무는 그런 할아버지나무를 가만히 우러러보았다. --- p.52-53
***** “우리는 왜 바람이나 구름처럼, 또 지난겨울에 왔던 노루나 사슴처럼 우리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걸까요?” 작은나무가 할아버지나무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나무는 그런 작은나무를 잔잔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멀리 큰 산 너머로 솜처럼 흰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얘야. 어린 시절엔 누구나 그런 꿈을 꾼단다. 그런 꿈을 한 번도 안 꾸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할아버지도 그러셨나요?” “그럼. 나도 너만 할 때 마음속으로 매일 그런 꿈을 꾸었단다.” “정말로 그래 봤으면 좋겠어요. 이 산에도 한번, 저 산에도 한번, 또 저 멀리 구름 아래의 큰 산에 가서도 한번 살아 보고 싶어요.” “너와 똑같은 꿈을 아주 오래도록 꾸던 나무들이 이 마당 안팎에도 여럿 있었지.” “꿈을 이룬 나무도 있었나요?” “그런 나무는 없었단다. 그 꿈 때문에 바깥세상만 궁금해하다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제자리에서조차 밀려난 나무들은 더러 있었지.” --- p.70-71
***** “할아버지가 이 나무를 상준이에게 주마. 그러니 내년에도 이 나무의 밤은 상준이가 와서 꼭 따라. 알았지?” “와아.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아이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밤이 달려 있을 때든 달려 있지 않을 때든 할아버지 집에 올 때마다 이 나무가 잘 자라는지도 지켜보고.” “예, 할아버지. 나무야, 고마워. 이렇게 네 열매를 줘서.” 작은나무도 아이를 향해 온몸의 가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것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감동이었다. 작은나무의 가슴이 활짝 열리고 그 안에 평생 얼굴을 떠올리며 이름을 부를 친구가 들어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