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루소 이후 서양에서 활약했던 지식인들의 위선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추적한 [지식인들]이라는 제하의 두 권짜리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나면 마르크스나 브레히트, 사르트르와 같은 지적 거장들에 대한 존경심이 일순에 가신다. 저자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 책의 얄미운 요지는 생생히 기억한다. “지식인들은 보편적인 인간은 사랑하지만 구체적인 인간은 사랑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식인들은 수천 년 전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동원되었던 노예의 인권이나 아무런 혈연도 없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기아에 대해서는 게거품을 물지만 현재 자신의 주위에 살아있는 부모나 형제, 배우자, 자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평생을 괴롭히는 이중인격자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이익과 선을 생각하는 지성인과 달리 지식인은 저 자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는 무리라는 80년대식의 의식화를 상기하면서 “당신이 방금 말하신 그 지식인은 지성인을 잘못 말하신 것이겠지요?”라고 말장난을 뇌까리며 덮은 그 책의 요지를 취미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떠올리는 까닭은 복잡하지 않다. 내가 보기에 무취미한 인간이 이런저런 취미를 가진 인간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바둑이나 낚시, 등산 등등의 취미에 빠진 인간이 제대로 가족구성원 노릇을 하는 걸 아직 못 봤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현관 앞에 군화가 놓여 있는 것을 봤다. 첫 휴가를 온 외사촌 동생이었다. 처음에는 “흠, 용돈을 5만원 주어야지”하고 생각했다. 내가 어릴 때 외삼촌으로부터 받은 용돈이 얼만데. 그러나 좀 있다가 생각이 바뀐다. “새로 나온 누구의 CD를 사야 하는데.” 그래서 2만원이 깎이고, 좀 있다가 1만 5천원이 다시 깎이고 한 30분 뒤에는 “에이, 돈도 없는데 다음에” 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 버린다. 취미에 빠진 사람에 의해 그의 가족이나 친구가 착취당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들은 자기 취미 속에 빠지기 위해 늘 “다음에” 하면서 달아나 버린다. 낚시광들의 ‘주말과부’는 그렇게 해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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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평소 지론에 의하면 인생이란 즐기는 것이다. 책이나 공부는 어떤 권리를 얻기 위한 패스포드일지는 몰라도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해변가의 모래밭에서 햇볕을 쬐거나 물장구치기, 산에 올라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거나 절 구경을 하는 것, 강아지나 고양이와 뒹굴며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맛있는 음식이나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 비오는 날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르게 창 밖을 바라보는 것, 공원의 벤치에 누워 햇빛에 물든 나뭇잎의 변화무쌍한 푸름을 즐기는 것,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하는 것, 분홍 신을 구해 신고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춤을 추는 것,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세 끼 식사를 걸러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온종일 입맞추는 것 등등. 음악은 좀 다른 경우에 속하지만 책이나 영화에서 훔치고자 하는 즐거움은 앞서의 즐거움을 대신하는 빈약한 대체물일 따름이다. 열거한 즐거움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거나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확고한 원칙과 각오만 되어있다면 철저히 개인적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오직 개인적인 만족과 즐거움만을 위해 주위에 눈을 돌리지 않고 사는 일이, 민족과 국가의 이름을 빌어 개인적인 사욕을 키우는 사람들보다 더 신뢰가 간다.
--- p.85
사회의 어떤 분야에든 무임승차는 있다. 하지만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아무런 시민운동 단체에 몸담고 있지 않은채 사회적 사안이 생길 때마다 양심가인양 짧은 글을 신문에 써대는 행태는 좋지 않다. ...(중략)... 퇴물 탤런트나 영화 배우가 인기를 등에 업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이 눈꼴사납듯이 문인들이 사회의 치부를 향해 감놔라 배놔라 라고 말하고 싶거든, 시민운동 단체에서 발로 뛰어야 한다. 여기에 무임승차는 없다. (장정일 단상 기록 "아무 뜻도 없어요"
--- p. 69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은 마음의 주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지, 장정일의 책임이 아니지만, 소설 자체가 음란한 것도 아니지만, 그와 같은 원인을 제공하는 행위를 차단하려는 국가의지에 대하여 장정일은 거리를 두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계속 취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음란성이 소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이 음란하다고 죄를 묻는 재판과정에서 단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 pp. 194~195
김희선과 최지우는 참 예쁘다. 두 사람이 서로 친한지 어쩐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두 사람이 분위기 좋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싼 식당에서 포도주를 한 잔씩 기울이며 가끔씩 인생을 이야기하였으면 하고 바란다...(중략)...두 미녀분들, 책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아는 편인데 며칠 전의 그 기사를 보았더라도 절대 책 읽지 마세요. 인생의 즐거운 일 가운데 분명 하나이기 때문에 두 분이서 포도주 마실 때, 나도 그 사이에 끼어 있고 싶어요.
--- pp. 8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