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도 가치를 주입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철학자 이졸데 카림에 따르면 우리는 다원화 시대를 살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에 어떤 것이 맞고 어떤 입장이 옳은지를 두고 끝없이 다투는 시대, 다양한 정체성들이 서로 경합하는 시대, 동질적이고 통일적인 사회를 찾을 수 없는 시대다. 생활양식의 다원화, 인구의 다원화, 정체성의 다원화를 되돌릴 길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첫 번째 문제란 바로 ‘우리란 무엇인가’다. 세대, 젠더, 계급, 인종, 민족, 장애 등으로 이토록 분열된 풍경 속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공유하고 있을까?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을까?
---「들어가며」중에서
모든 것에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자율성의 상태로는 의미 있게 살아갈 수가 없다. 세계와의 공명을 놓치는 허무주의적 상태로 들어가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공동체와의 공명에만 집중하면, 그 공명이 어떤 구조 위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무감해지기 쉽다. 요컨대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감사하는 인간과 비판하는 인간 사이의 균형 잡기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처하는 아주 흔하고 피부에 와 닿는 사례로 이를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윗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친 작가나 정치인이 죽었을 때 그의 과오와 성취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상사나 클라이언트와 의견이 부딪칠 때 얼마나 감사를 전하고 어떻게 적절하게 대응할 것인가? 이 각각의 경우들마다 우리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일반화되기 어려운, 미묘하고 복잡한 사태들이기 때문이다. …… 과거에는 감사의 과도함이 정당한 비판과 문제제기를 사전에 막았다면, 오늘날에는 비판의 과도함이 상황도 맥락도 고려하지 않은 채 증오와 혐오의 연쇄를 불러오고 있는 셈이다.
---「5장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건너기 : 『모든 것은 빛난다』」중에서
새삼 고백하자면 한국에서 최신 인류학 책을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여기에서 소개한 두 사상가들은 통상적 의미의 인류학을 행하고 있지도 않기에 더더욱 읽기가 쉽지 않다. …… 2022년에 들어와 ‘편집자를 위한 철학 독서회’ 모임에서 다른 편집자 동료들과 함께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을 그저 하나의 인류학 이론으로가 아니라 내 삶과 연결된 것으로 읽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4년 만에 다시 본 『부분적인 연결들』은 다른 무엇보다 인류학자 자신이 행하는 현장 연구 작업을 하나의 완결된 글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쓰는 일의 어려움을 고민하는 책으로 달리 보였다. 동료 편집자들이 솔직하게 나누어 준 독해 경험 속에서 나는 이 책이 현장에 있는 연구자들과 편집자들에게, 그리고 타인과 함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그것을 글로 쓰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유용한 책일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7장 어색한 관계의 생산성: 『부분적인 연결들』(2019), 『해러웨이 선언문』(2019)」중에서
팬데믹은 우리가 공통 세계의 이상을 포기했을 때조차도 공통의 바이러스를 공유할 수밖에 없는 공동적 존재임을 드러냈다. 격리와 봉쇄라는 고통스러운 시련이 신기후체제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계기가 된 셈이다. 라투르 자신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줄곧 제안해 왔던 이것을 갑자기 모든 사람이 온몸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시인 김수영은 시를 쓰는 일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어쩌면 기후변화와 인류세라는 거대한 문제에 대처하는 일도 그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생사가 걸린 문제, 온몸으로 싸워야 하는 문제가 될 때 우리의 세계관, 우리의 우주론, 우리의 생활양식, 결국 우리의 미래상 자체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온몸으로 후퇴하기’가 우리의 새로운 구호가 될 수 있을까?
---「9장 온몸으로 후퇴하기: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