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솔이 태어난 서부리 초가집은 성벽 서남쪽 바깥에 위치해 있었다. 집 뒷마당이 언양 읍성의 성벽과 맞닿아 있어 이 성벽과 그 근처 화장산은 어릴 적 그의 놀이터와 다름없었다. 다섯이나 되는 누나 중 셋째 누나 덕조(德祚)가 어린 눈솔에게 흰 염소 이야기를 들려준 뒤 그에게 커서 누구에게 장가가겠느냐고 묻곤 하였다. 그러면 어렸을 때부터 돌을 쌓아 만든 성 안에 흰 염소가 풀을 뜯어먹는 모습을 보며 자란 눈솔은 “성 안의 흰 양생이(염소)한테 장가가지”라고 대답하였다. 이렇듯 눈솔은 어린 시절부터 동화와 전설의 세계에서 살았다. 더구나 이 성벽과 관련해서는 임진왜란에 얽힌 설화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또한 화장산과 관련한 이야기도 어린 소년 눈솔의 상상력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눈솔이 평생 설화와 전설, 민담, 신화, 민속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도 따지고 보면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상상력의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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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여름방학 때 고향에 돌아온 눈솔은 이제는 남의 아내가 된 첫사랑을 만나기 위하여 고모 집을 방문하여 어린 고종사촌 누이에게 편지를 전하게 하여 그녀를 만난다. 첫사랑을 만나는 순간 그는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더는 머무를 수 없어 그냥 그녀의 집을 나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집을 나오기 직전 그의 행동이 대학생의 정상적인 행동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비상식적이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솔은 대문간에서 그녀의 머리채에서 금비녀를 뽑아 가지고 집을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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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솔만큼 색동회에 그렇게 헌신적인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1967년 6월 눈솔은 색동회 회원으로 아직 생존해 있던 조재호, 윤극영, 진장섭, 이헌구와 상의하여 방정환 사망 이후 시들어간 색동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1971년이 소파 탄생 70년 주년이 되므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소파 동상 건립추진회’를 결성하고 그해 7월 마침내 남산 안중근 열사 기념관 서남쪽 산비탈 공원에 소파 방정환 동상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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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솔은 언젠가 「산들바람」을 창작하게 된 과정을 회고한 적이 있다. 연희전문 교수 시절 눈솔은 동료 교수 중에서도 작곡가 현제명(玄濟明)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제명은 눈솔에게 조금 ‘산뜻하고 달콤한’ 노래를 작곡하고 싶으니 시 한 편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눈솔이 지은 시가 「산들바람」이다. 그는 “이때 내 마음속에는 잊혀지지 않는 여인들의 추억과 나와 같이 경성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했다가 1931년 7월 30일에 사망한 소파 방정환을 생각했다. 이 노래는 현제명 씨의 작곡으로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줄 안다”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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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눈솔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평소 전설, 민담, 설화, 신화 등에 관심이 많은 그는 마을 사람한테서 옛날이야기를 듣거나 그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눈솔의 큰아들 해룡은 한 일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연희전문에 재직할 당시 저녁이 되면 집 안마당에는 항상 이웃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모여 선친의 이야기 구연을 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선친의 우리 설화에 대한 집착이 그런 방법으로 표출됐으며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한국 구비문학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밝힌 적이 있다. 눈솔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 최초로 스토리텔링을 소개한 인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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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솔은 최현배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근무할 무렵 어떤 때는 같은 사무실을 쓰면서 한글 문제를 두고 의견을 나누었다. 비록 11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은 같은 울산 출신이라서 누구보다도 동향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눈솔과 외솔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언성을 높일 때도 있었다. 최현배는 학교를 ‘배움터’로, 비행기를 ‘날틀’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눈솔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까지는 없고 한글로 그냥 ‘학교’와 ‘비행기’로 표기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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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솔 정인섭은 한글 운동 못지않게 극예술 운동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무렵 외국문학연구회 회원들은 문학예술에서 무대예술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1931년 7월 경성에서 신극 운동 단체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였다. 극예술연구회 조직과 관련하여 정인섭은 한 인터뷰에서 “1931년, 해외문학파들이 세계문학을 소개하는 데는 출판보다 연극이 호소력이 있다고 생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겁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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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눈솔이 자발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 행위로 그의 업적 모두를 덮어 버리는 데는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값비싼 포도주를 따다가 코르크 마개가 병 속으로 들어갔다고 가정해 보자. 포도주 전체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코르크 부스러기를 걸러내고 포도주를 마실 것인가? 이 책의 저자(김욱동)는 전자보다는 후자를 택하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눈솔의 친일 행위는 분명히 밝혀냄으로써 후세에게 경종을 울려 마땅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이룩한 업적은 업적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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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머무는 동안 눈솔 정인섭은 학문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뿐만 아니라 한국을 널리 알리거나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영중친선협회(英中親善協會)에서는 한국전쟁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온 한 영국군 대위를 초빙하여 강연회를 연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강연을 주최한 협회의 회장이 사회를 보면서 남한이 먼저 북한을 침범했다는 요지로 말하였다. 그러자 눈솔은 손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는 전쟁이 일어날 당시 서울에 있었고 북한군이 남한을 먼저 침범한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반박하였다.
--- p.251
눈솔은 그동안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두고 외솔 최현배와 많이 다투었는데 한글을 풀어쓰기로 할 것인가, 아니면 모아쓰기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도 의견이 서로 크게 엇갈렸다. 최현배는 『글자의 혁명』(1947, 개정판 1956) 에서 세로쓰기(종서) 대신 가로쓰기(횡서) 를 주장한다. 적어도 이 점에서 최현배는 눈솔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눈솔도 그동안 가로쓰기를 줄기차게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다만 풀어쓰기를 할 것이냐, 모아쓰기를 할 것이냐를 두고는 두 사람의 견해가 서로 달랐다. 최현배는 풀어쓰기를 제안하면서 다른 풀어쓰기 주창자처럼 자음 ‘ㅇ’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궁극적으로 꿈꾸던 한글 글자의 혁명은 로마자와 비슷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로마자를 그대로 사용하자는 주장에는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 p.255
눈솔은 「후회 없는 인생」이라는 글에서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밝힌다. 50년 가깝게 국내외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여러 학회를 조직하거나 관계하여 “문학 활동에 선구자 노릇”을 해 온 탓인지 돌이켜보면 “기쁘고 즐거운” 삶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러면서 눈솔은 “그동안 내가 저서한 30여 권의 책을 응접실 책장에 꽂아놓고 그것을 넌지시 쳐다보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을 성지 순례자로 자처하면서 미소를 띠운다”고 말한 적이 있다.
--- p.298
동시대에 태어나 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눈솔 정인섭이 걸어 온 ‘가시밭길’은 그렇게 험난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그는 그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눈솔은 이러한 역경 속에서 한국의 문학계와 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80년 가깝게 그가 걸어 온 험난한 여정에서 궁핍한 시대를 산 한 지식인의 열정과 고뇌를 엿볼 수 있다. 눈솔 정인섭의 삶은 곧 20세기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다 간 한 식민지 지식인의 슬픈 초상이요 발자취인 것이다.
--- 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