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기분 전환은 현대인에게 활력소가 되어준다. 내 기분 전환법 중 하나는 나와는 무관한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다. 취재가 잘 풀리지 않거나 자료를 구하지 못할 때 나는 편히 누워 문고본을 읽는다. 내용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다 보면 풀리지 않던 취재의 새로운 방향이 보이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기리노 나쓰오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1997)이다.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여탐정 무라노 미로가 활약하는 인기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페미니즘 계열 출판사 여사장의 의뢰로 실종된 AV 여배우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이후 여성 작가들이 여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많이 발표했는데,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시리즈’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 시리즈를 읽다 보면 탐정이라는 직업이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파헤치는 일인 만큼,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고 악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여성이 일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가 있다. 여성의 자립과 가능성을 지적하는 의미에서도 내게는 관심이 가는 분야다. 그리고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에 묘사되어 있는 AV 산업의 세계가 내게는 미지의 분야인 만큼 흥미가 일었다.
현재 일본에서 ‘3000억~4000억 엔 시장’으로 꼽히고, 일각에서는 ‘1조 엔 시장’이라고도 하는 AV 산업. 페미니즘에서는 성인 비디오를 포르노그래피의 최고봉이라고 하며 ‘남성에게 성적 흥분을 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성의 나체상 등을 매매하는 것’(에하라 유미코, 『성의 상품화』, 1995)이라고 말해왔다. 여성의 존엄과 자립을 요구해온 나 역시 성인 비디오를 ‘영상이나 언어를 통해 여성을 예속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현재 1조 엔 시장이라고도 여겨지는 AV 산업은 성인 비디오를 대여하거나 구입하는 사람들(수요자)이 있기 때문에 성립되는 점을 감안하면 ‘성인 비디오는 여성 멸시 그 자체!’라고 화만 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최근에는 여성들도 통신판매를 통해 여성용 성인 비디오를 구입하거나, 여성용 성인 용품 가게에서 여성용 성인 비디오가 매매되고 있다고 하니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게 사실이다.
1970년대 초반 여성해방운동의 영향으로 섹스나 에로스는 남녀의(물론 동성 간에도)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여성의 성에 대한 개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이 여성용 성인 비디오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남녀 모두 성인 비디오를 보고 싶어 한다면 어떤 내용의 작품을 원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물론 성인 비디오가 어떻게 제작되고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작품에 여성을 멸시하는 시각이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내포되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출연 배우들의 인권은 존중되고 있는지도 취재해 밝히고 싶었다.
그리고 자료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AV 여배우와 성적 학대의 상관관계다. 취재 중에도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성적 학대를 경험한 여배우가 많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아동 학대란 구타나 담뱃불로 지지는 등의 ‘신체적 학대’뿐 아니라 ‘정신적 학대’나 ‘양육 방임(밥을 주지 않는 등의 의식주와 관련한 방치)’과 함께 ‘성적 학대’도 포함된다는 것은 2000년 5월에 제정된 ‘아동 학대 방지 등에 관한 법률’(이하 아동학대방지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성적 학대는 아동학대방지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남의 가정사에 간섭할 수 없다는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은폐되어온 게 사실이다. 전국적으로 처음으로 실태 조사를 벌인 것은 학자와 변호사들로 구성된 ‘어린이와 가족의 마음과 건강’ 조사위원회(대표: 히라야마 무네히로 도쿄대 명예교수)였다. 1998년 12월 전국 150곳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18세부터 39세까지의 여성(5000명)과 남성(2000명)을 대상으로 우편 조사를 실시한 결과(회수율 22.4%)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성적 학대를 경험한 여성은 58.8퍼센트이고 남성은 12퍼센트였다.
성적 학대의 가해자는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 친아버지나 의붓아버지 또는 오빠와 같은 가족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피해자인 어린이가 용기를 내어 구원을 요청해도 가해자가 이를 부인해버리면 공공기관은 더 이상 관여할 수가 없었다.
특히 성적 학대는 학대받는 어린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그 사실을 인지하고 심리적인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으며 등교 거부, 비행, 매춘, 약물중독, 자살 미수와 같은 일탈 행동으로 나타난다. 또 어린 시절 장기간에 걸쳐 심한 학대를 받으면 다중인격이 형성되기도 하는데, 이 다중인격과 AV 여배우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싶었다.
또 다양한 내용을 다루는 성인 비디오 중에는 강간물이나 기획물처럼 극단적으로 여성을 멸시하는 내용을 담거나 여성을 인격체로 여기지 않는 작품도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무料이며 왜 그런 작품이 인기가 있는 걸까.
199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가정폭력세계회의’(아동·여성·노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을 근절시키는 회의)에 참석한 이후 『아동 학대』(2000), 『노인 학대』(2000), 『여성에 대한 폭력』(2001), 『늘어나는 소녀 매춘』(2001) 등의 책을 써온 나는 한 남성상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더 콤플렉스’라고 불리는, ‘모자간(母子間)의 분리’가 안 된 남성상이다. 『늘어나는 소녀 매춘』에서도 소개했지만 모자간의 분리가 안 된 남성은 ‘성관계 시 상대 여성 안에 자신을 성 불능으로 만드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것을 뿌리치려고 할 때 공격적으로 변한다(기시다 슈 『성적 유환론 서설』, 1999)’.
즉 기시다 슈에 따르면 어머니의 자기애에 얽매여 정서적으로 어머니와의 관계를 잘 끊지 못한 남성은 ‘성관계를 맺기 위해 상대 여성을 정서적인 관계에서(적어도 성관계를 맺을 때만이라도) 배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성인 비디오는 직접적인 성행위가 아니라 섹스에 대한 환상이다. 거기에는 쌍방의 만족은 없고 자기만족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자간의 분리가 안 된 남성은 어머니의 이미지가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성인 비디오를 통해 공격적인 성행위 장면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회 환경도 무관하지는 않다. 법률로는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있지만 성희롱이나 강간 등의 성범죄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인 점을 감안할 때, 폭력적인 내용의 성인 비디오가 남존여비, 나아가 여성을 멸시하는 문화에서 생겨난 것만은 분명하다. 여성은 폭력적인 섹스에 열광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남성 위주의 문화가 팽배한 사회가 그 배경이 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남근지상주의’ 문화 말이다.
성인 비디오라는 말만 들어도 ‘불결하다! 생각하기도 싫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여성이 많은 것 같은데, 남성들이 주로 자위행위를 목적으로 이용한다는 이 성인 비디오는 한 달에 1000~1500편이 제작되고, 전국 6000여 곳의 비디오 대여점과 3000여 곳의 판매점에서 대여되거나 팔리고 있다. 또 AV 산업은 100여 사에 이르는 성인 비디오 업체를 지원하는 제작사, AV 여배우를 파견하는 모델 프로덕션, 필름회사, 인쇄회사, 비디오 플레이어를 취급하는 가전업체, 운송회사 그리고 최근에 유행하는 휴대폰이나 인터넷의 전송 서비스까지 포함하면 약 1조 엔에 이르는 거대한 산업이다. AV 산업도 빌리거나 구매하는 사람들(유저)이 있기 때문에 성립되는 산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그 시장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많은 AV 작품에 ‘젠더 바이어스’(사회가 요구하는 남존여비적인 남성다움의 규범)가 묘사되고 있다면 이 또한 간과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본능이 파괴된 동물’인 인간이 성에 대한 정보를 통해 성욕이나 성행위의 모습을 습득하는 거라면 비록 섹스에 대한 환상일지언정 AV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성인 비디오가 탄생하게 된 배경과 제작 과정, 유저들의 의식(설문조사), 성인 비디오의 내용과 그 문제점, AV 업계의 문제점, AV 산업에 바라는 점 등을 나름대로 제기하고자 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