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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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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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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11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372쪽 | 454g | 148*210*30mm
ISBN13 9788972755623
ISBN10 897275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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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집 1층에 작업장을 두고 망가진 가구를 수선하는 일을 주로 했다. 신품을 만드는 이 더 보람도 있을 테고 기분도 좋을 텐데 왜 낡은 가구만 상대하는지, 소년은 늘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신품은 너무 위세가 좋으니 말이다.”
할아버지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좀 힘 빠진 녀석을 더 신경 써줘야 하는 거다.”
소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p.15

소년은 할머니에게 어째서 입술을 떼었느냐고 물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야 숨을 못 쉬니 그렇지.”
할머니의 대답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이었다.
“숨은 코로도 쉴 수 있잖아요.”
“그럼 젖은 어떻게 빨 거냐?”
“그럼 하느님은 왜 나를 젖도 빨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신 거예요?”
할머니는 바느질을 중단하고 앞치마 끝에 늘어뜨린 행주를 뭉쳤다가 폈다 하며 시간을 벌었다.
“하느님도 가끔은 허둥댈 때가 있단다.”
손안에서 다양하게 형태를 달리하는 행주를 보며 할머니는 말했다.
“다른 데 특별히 신경을 써주시느라, 그래서 마지막에 입술을 뗄 시간이 없었던 게 아닐까.”
“다른 데라뇨?”
“그건 할미도 모르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말이다. 눈인지, 귀인지, 목인지, 좌우지간 어딘가에 보통 사람한테는 없는 특별한 장치를 해주신 게야. 그래, 그거다. 틀림없어.” ---pp.28~29

소년은 한평생 그 일요일에 있었던 일을 거듭 돌이켜 생각해보게 된다. 그 밖의 추억과는 별도로 특별한 작은 상자에 넣어두고는, 몇 번이고 상자를 열어 살며시 보듬게 된다. 체스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낄 만큼 상처를 입었을 때, 마스터의 추억에 잠겨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을 때, 그 포근한 겨울 햇살에 싸인 회송 버스에서 두었던 게임을 생각하며 마스터가 가르쳐준 체스의 기쁨에서 구원을 발견하게 된다. ---p.66

폰을 끌어안고 빛의 띠에 몸을 맡겼을 때, 소년은 지금껏 맛본 적이 없는 기묘한 감촉을 느꼈다. 소년은 백화점 옥상에서,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수면은 저 멀리 위에 있고, 바닥은 너무나도 깊고, 물은 차가운데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무섭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몸 어디에도 괜한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아아, 나는 입술이 됐구나. 소년은 깨달았다. 의사가 쓸데없이 손을 대기 이전의, 서로 포옹하듯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상태의 입술로 바다 속을 여행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인디라와 미라도 같이 있었다. 인디라는 코를 휘휘 젓고 귀를 펄럭이며 소년의 주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물론 족쇄는 차지 않았다. 네 다리는 옥상의 콘크리트 바닥을 차고 날아올라 자유롭게 움직였다. 헤엄친다기보다 마치 환희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라는 폰이 토해낸 공기 방울에 들어가 인디라가 일으키는 해류를 타고 떠다녔다. ---pp.69~70

“체스는 머리가 좋고 나쁜 것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게 아니란다.”
“운도 필요하단 뜻이에요?”
“아니. 운은 상관없다. 운이 좋았던 것 같은 시합이라도,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진 게 아니라 본인이 자기 힘으로 이끌어낸 거야. 체스판에는 말을 만지는 사람의 인격이 고스란히 드러나거든.”
마스터는 선언문을 낭독하는 듯한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철학, 정서, 교양, 품성, 자아, 욕망, 기억, 미래, 좌우지간 전부다. 감출 수가 없어. 체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거울인 거다.” ---p.80

“진심으로 잘 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도, 상대방이 실수를 했을 때도 아니거든요. 상대편 말의 힘이 이 진영까지 메아리쳐서 제 말의 힘이랑 공명할 때예요. 그러면, 말들이 제가 상상도 못 해본 음색의 소리를 내요. 그 음색을 듣고 있노라면 아아, 지금 체스판에서 올바른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그런 기분이 들어요. ---p.105

“내 친구는 모두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사람들뿐이었거든. (……) 자기가 원한 것도 아닌데 다들 정신이 들어보니까 그렇게 돼 있었어. 그렇지만 아무도 빠져나가려고 버둥대지 않았어. 불평도 하지 않았고. 그런가, 나한테 주어진 곳은 여기인가, 하고 말없이 받아들이곤 거기에 몸을 두었어.”
---pp.183~184

“체스판은 위대해요. 그냥 평평한 나무판자에 가로세로로 줄을 그었을 뿐인데도 우리가 어떤 탈것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우주를 감추고 있어요.”
리틀 알레힌은 입술을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체스를 두는 사람은 공연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기 스타일을 구축하고, 자기 인생관을 표현하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고, 자기를 멋지게 보이려는 그런 건 전부 허사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자기보다 체스의 우주가 훨씬 광대하니까요. 자기 같은 하찮은 것에 구애되면 진정한 체스는 둘 수 없어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돼서 이기고 싶다는 마음조차도 초월하고 체스의 우주를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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