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다만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지요. 그런데 진정한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오히려 주위 사람과 내가 어떻게 다른지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데카르트는 잠시 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했다.
“남과 다른 자신이라….”
히라타는 팔짱을 끼고 혼잣말을 했다.
“의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저것도 틀렸다, 이것도 틀렸다 하는 식으로 객관성을 갖추게 됩니다. 그전의 자신은 세상에 묻혀 있습니다. 세상에 묻히면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데카르트가 그렇게 말하자, 히라타와 가와구치는 동시에 질문하려다가 눈길이 마주쳤다. 그러자 히라타가 젊은 가와구치에게 양보했다.
“자신이 세상에 묻혀 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목을 빼고 데카르트의 대답을 기다리는 히라타의 모습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 역시 가와구치와 똑같은 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둘 다 자신답게 사는 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모른다면,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내가 A든 B든 상관없습니다. 나여야 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것이 세상에 묻힌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남과 내가 무엇이 다른지 의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 이제 조금 정리해볼까요?”
데카르트는 그렇게 말하고 분필을 들었다.
“남과 다른 나…. 내 의식은 타인의 의식과 다르다…. 남과 자신의 다른 점을 알게 되면 세상도 제대로 볼 수 있겠군요.”---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정말 나인가? - 데카르트」
“사고는 우주를 둘러싼다라…. 생각하는 행위가 그만큼 위대하다는 거군요.”
“네. 생각이라는 행위는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 자신의 약함과 비참함을 한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 바꿔보면, 비참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만큼 식물이나 동물보다 위대하다고 할 수 있지요.”
가와구치가 감동해서 말하자 파스칼도 힘주어 말했다.
“저는 요즘 생각을 하기 싫은데도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 고민이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왠지 개운해지는 느낌이네요.”
요즘 들어 계속 굳어 있던 가와구치의 얼굴이 이제 조금 온화해진 것처럼 보였다.
“인간에게 생각하는 행위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 것은 인간에게 그만큼 고민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고민을 방치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맞서 싸우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요.”
파스칼은 가와구치에게 용기를 주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자아의 두 내면, 강철 혹은 풀잎 - 파스칼」
“아닙니다. 저는 절망하면 죽게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절망의 고뇌는 우리를 죽을 수 없게 만듭니다. 죽을 만큼 괴로워하면서도 절대 죽지 못하는 겁니다.”
키르케고르는 시라토리의 말을 즉시 부정했다.
“죽지 못한다고요? 계속 사는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요?”
시라토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절망해서 죽음을 생각할 때, 사실 그 사람은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망한 인간은 죽지 못합니다. 칼이 사상을 죽일 수 없는 것처럼 절망 또한 자기 자신을 집어삼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절망의 공식입니다.”
“절망의 공식….”
시라토리가 키르케고르의 말을 되새기듯 천천히 중얼거렸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절망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런 자신이 싫어서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집어삼키려 합니다. 즉, 죽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집어삼킬 수는 없지요. 이것이 바로 인간 안에 영원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말하자면 인간 속에 영원한 이상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절망해도 죽지 못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인간 안에 그런 영원한 존재가 없었다면 애초에 인간이 절망하게 되지도 않았겠지요. 사람은 이상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는 겁니다.”
키르케고르가 말을 마치자 히라타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쉽게 죽지 못하는 거군.”
“네?”
가와구치가 그 말에 즉시 반응했다.
“아니. 그게 말이야, 그렇게나 불안해하고 절망하는데도 사람들이 왜 다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 자살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기는 하지만 절망하는 사람은 훨씬 더 많잖아. 그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는지 궁금했어.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해가 되네.”
“어떻게요?”
가와구치는 히라타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절망은 자기 안에 영원한 존재가 있기 때문에 하는 거지? 반대로 말해, 영원한 존재가 있는 한 절망이 자신을 먹어치우는 일은 없어. 절망해 있는 동안은 죽지 않는 거라고.”--- 「절망과 희망의 기묘한 공생 - 키르케고르」
“우리는 물건의 사용가치를 추구하여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호의 교환가치를 추구하여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브랜드 상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명품 가방은 저렴한 가방에 비해 물건을 넣어 가지고 다니기 편하다는 이유로 선호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왜 살까요?”
“자기만족이죠. 정확히 말하면 우월감이에요.”
시라토리가 팔과 다리를 꼬고 앉아 그렇게 단언했다. 대사와 자세가 정말 잘 어울렸다.
“맞습니다. 명품 가방은 사용가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감을 만족시키거나 남보다 돋보이기 위해 구입하는 물건입니다.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물건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구입하는 소비 행태가 나타나죠.”
“믿기지 않는군요.”
보드리야르의 설명에 가네코는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그런 일은 실제로 흔합니다.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호라서 사는 거죠. 저는 『소비사회의 신화와 구조』에서 소비 체계를 기호와 차이의 코드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설명했습니다. 다시 말해 소비는 커뮤니케이션과 교환의 시스템이자 끊임없이 발생하고 거래되고 재생되는 기호의 코드, 즉 언어의 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소비가 언어활동인 이상, 그것은 언어 체계 같은 하나의 체계하에 영위되게 마련입니다. 소비의 경우에는 소비사회의 시스템이 그 체계에 해당되겠지요. 우리는 지금 그 체계하에 기호를 거래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칠판에 적어가면서 한참 설명한 뒤에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약간 짬을 두었다. 그때 히라타가 아직 이해가 안 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마디로 말해, 소비가 상품 자체의 거래가 아닌 상품 이름만 교환하는 행위가 되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상품이라고 하면 알기 쉽겠네요. 물건의 이름, 즉 말만 기호로서 교환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우리가 평소에 소비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새로운 물건, 새로운 상품, 즉 기호에 불과하다는 말이네요. 하긴 이미 갖고 있는 물건만으로는 뭔가 아쉬울 때가 많으니까요. 계속 새로운 물건이 갖고 싶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였군요.”
(…) 모두 소비에 다소 편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소비는 좋지 않지만 의미 있는 소비는 확실히 허용되어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취미가 쇼핑인 사람 역시, 물건을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소비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그중에는 스트레스 발산을 위해 쇼핑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쇼핑이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소비욕 - 보드리야르」
“뿌리부터 뒤엎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선생님, 우리 인생은 어떨까요? 인생을 뿌리부터 뒤엎을 수도 있나요?”
가와구치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질문했다. 이것이 오늘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데리다가 그렇게 답하자 가와구치는 안도감과 흥분이 뒤섞인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히라타가 또 영화 이야기를 시작했다.
“〈멀티플 새커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인생을 확 바꿔버리는 내용이니 그야말로 탈구축이죠. 건축가로서 인생을 순조롭게 살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각본을 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결국 각본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 때문에 직업도 잃고 부인과도 이혼하고 맙니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쓴 보람이 있었는지 그 각본은 히트합니다. 그리고 진짜로 좋아했던 사람과 재혼까지 해서 소위 말하는 인생 역전을 하죠. 인생의 탈구축에는 역시 그 정도의 각오가 있어야 하는 건가요?”
“이미 확립된 기준을 의심하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때 얼마간 위험이 동반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구축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진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모순을 안은 채 살다가 어느 날 어딘가에서 붕괴되어버릴 인생이라면, 지금 내 손으로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올리는 편이 나을 겁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이니까요.”
--- 「나도 모르는 나의 길, 인생 - 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