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목사님은 명확한 주제를 단순하고 간결한 말로 설교했습니다. 발음은 정확했고, 음성의 높낮이는 분명했습니다. 무겁고 어려운 주제도 쉽고 단순하게 전달했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있었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와 감동을 받았고, 신앙의 결단을 했으며,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많은 젊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은 한 목사님의 설교를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신학교 기숙사 방에서 거울을 앞에 놓고 한 목사님의 말투와 손짓을 연습하는 신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밖에서 소리만 들으면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같이 흉내 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그 형식과 음성이 전부가 아닙니다.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신앙 체험과 신앙 형성이 중요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는 한 목사님의 생애와 신앙 체험에서 비롯됩니다. 한 목사님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을 시절에 성장했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이 가득하던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자연과학을 공부하다가 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복음으로 나라를 살리겠다는 결단으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예일 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공부하려고 계획하고 진행하다가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죽을병에 걸린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자 할 수 없이 미국에서 병을 치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낯선 나라의 폐결핵 요양원에서 가족이나 친구도 없이 외로운 중에 투병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병을 낫게 해주시면 조국으로 돌아가 주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기도하고, 응답을 받아 병이 나았습니다.
일제 치하의 조국에 돌아온 후, 은사이신 조만식 장로님의 부름을 받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그 후 신의주 제이교회의 청빙을 받아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크게 부흥하고 성장했지만, 또다시 일제의 압력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보린원에서 노인, 고아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쫓겨서 월남했습니다. 그 후 영락교회를 세우고 급성장하면서 교회를 건축하고 입당했지만, 일주일 후에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또다시 피란을 가야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이렇게 개인의 질병과 일제에 의한 추방, 나라 잃은 설움과 전쟁 등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사역하면서 설교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한 목사님의 설교는 고난과 강한 신앙체험 속에서 터져 나오는 깊이 있는 내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한경직 목사님은 균형 잡힌 목회를 추구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정한 영락교회 신앙지도 원칙은 4가지입니다. 경건한 복음주의 신앙의 육성, 청교도적 생활윤리의 훈련, 교회연합 정신의 구현, 세상에서 하나님 공의의 실현이 그것입니다. 균형이 잘 잡힌 4가지 신앙지도 원칙을 가지고, 교회를 목회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목표를 3가지로 설정했습니다. 전도, 교육, 봉사입니다. 균형 잡힌 교회의 목표를 가지고, 균형 잡힌 목회를 했습니다. 자연히 한 목사님의 설교는 균형 잡힌 설교가 되었습니다. 개인 구원을 위해 전도에 힘을 쏟으면서도,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 해야 할 교회와 교인의 책임에 대해서도 설교했습니다. 신학적으로 건전하면서도 견고했습니다. 신앙성장이 일어나도록 강력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도록 무섭게 도전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는 이 시대의 살아 있는 고전입니다. 설교할 당시에도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었지만, 지금도 역시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고 결단이 일어나는 설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이러한 한 목사님의 설교들을 주제별로 묶어 책으로 펴내니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이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를 읽고, 은혜 받고, 도전 받고, 결단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한경직 목사의 명품 설교 시리즈〉를 기획하고 출판한 모든 사역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철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