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가타라는 『천의 고원』가은데 유목주의 제창하는 아름다운 글에서 전혀 다른 본성을 갖는 두 가지 공간을 구별한 바 있다. '흠패인 공간',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란 유목민의 공간이다. 몽골의 초원이나 사막, 에스키모의 얼음 사막, 혹은 해상부족들의 바다처럼 운동이나 흐름이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서는 멈추고 머무는 점(가령 오아시스나 우물이 있는 곳)은 옮겨다니고 이동하는 선에 종속되어 있으며, 광대하지만 그렇기에 특별한 풍경을 통해 '이곳'이 어디인지 구별하기 힘든, 대신에 바람과 풀, 지표면의 흙의 색깔이나 감촉 등으로써 구별해야 하는 공간이며, 그래서 시각 대신에 촉각이 우위를 점하는 그런 공간이다.
반면 도시로 대표되는 홈 패인 공간은 국가장치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삶이나 운동, 흐름이 '마구잡이로' 흐르지 않도록 홈을 파 그안으로만 흐르게 하는 공간이다. 자동차나 행인의 움직임을 가둔 도시의도로, 거기선 막히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갈 수 있는 방향은 홈으로 고정되어 있다. 이동이 있지만 이동은 언제나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며, 선은 그것을 연결하는 것으로 점에 종속되어 있다. (…)
<와호장룡>은 이 두 개의 공간 사이에서 진행되고, 그것을 통해 그 두 가지 공간 사이에 있으며, 두 공간 모두와 소통하는 제3의 공간을 다루고 있다. 무사 내지 무인들이 떠도는 곳, 통상 '강호'라고 불리는 세계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거야 모든 무협지, 모든 무협영화에 공통되 것이 아닌가? 물론이다. 그러나 전쟁이 등장하는 숱한 영화가 전쟁의 본질을 다루는 것은 아니며 폭력이 난무하는 숱한 영화가 폭력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강호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주는 건 아주 쉽지만, 강호가 갖고 있는 본성을 보여주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이를 위해 강호가 어떤 곳인가를 말하게 하는 서술적 방법이 통상 사용된다. 이 영화 또한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 영화가 다른 것은 강호를 보는 시각의 편차를 극대화하고 그 시점을 다변화한다는 점이다.강호란 대체 어떤 곳일까? 먼저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용'에게 강호란, 권력과 부의 교환을 위한 결혼 같은 속박이고 얽매인 세계와 대비되는 자유로운 세계다. “강호인이 되면 정말 자유롭다죠?” 반면 그의 아버지 옥대인이나, 무당파르 ㄹ돌보아주는 '아저씨' 패이러에게 강호란 혼란스럽고 바람잘 날 없는 세게다. 하지만 도시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선 국가관리 또한 “강호와 적절한 관게를 유히해야” 한다. '용'이 속박과 자유의 대비를 보는 곳에서 그들은 질서와 혼란의 대비를 본다.
한편 용의 사부이기도 했던 '푸른 여우'에게 강호란 강자가 지배하는 세계이자, 자신이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누구든 죽여야 하는 “죽고 죽이는” 세계다. “방해가 되는 건 모두 죽여, 심지어 네 아버지라도 강호란 그런 거야. 죽고 죽이고 짜릿하기 않아?” 용이 꿈꾸는 자유란 그처럼 남을 짓밟고 죽여서 얻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언뜻보면 리무바이 또한 비슷하게 말한다. “강호란 고수와 부패가 판치는 곳이요.” 하지만 사실은 푸른 여우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래서 푸른 여우는 “하나뿐인 제자” 용을 데리고 강호로 가고자 하지만, 리무바이는 강호의 최고수 자리를 버리고 강호를 떠나려 한다. 수련은 또 다르게 말한다. 자신은 강호에서 살았지만 자유로운 적은 없었다면서. “우정, 신의, 그게 없으면 오래 버티지 못해요”
--- pp.13~16
<풀 몬티>는 시선에 관한 영화다. 실업을 명시적이고 직접적인 소재로 하고 있지만, 실업의 문제를 다루 때조차도 이 영화는 시선의 문제로서 다룬다는 점에서 시선에 관한 영화다. 실업자를 보는 타인들의 시선, 실업자를 보는 가족들의 시선, 실업 당한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시선. 물론 시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외부를 놓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실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본의 저주, 그 저주받은 자들의 고달픈 삶 등. 그러나 빗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과 달리, 그 고통스런 삶에 감정이입하기보다는 스트립쇼라는 항당무계한 '대책'을 통해 그것을 쉽게 웃어넘기도록 한다. 남의 고통에 동조하여 '대책'을 통해 그것을 쉽게 웃어넘기도록 한다. 남의 고통에 동조하여 고통을 '낟누도록' 하는 것과, 고통스런 처지를 웃으면서 잊게 해주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좋은 방법일까?
또한 <풀 몬티>는 실업을 빌미로 남성들을 스트립쇼의 무대로 몰고감으로써 이들을 다시 한번 시선의 장 속에, 하지만 다른 종류의 시선으 장 속에 밀어 넣는다. 신체, 아니 육체를 보는 시선들, 그리고 그런 시선으로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는 자신들. 이 시선은 이들을 옷을 벗는 쇼로 유혹한 것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 시선이 이들로 하여금 옷을 벗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시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외부를 놓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고립되어 더욱 고통스런 복수의 신체들을 하나의 새로운 신체로 묶어주는 끈, 아무런 인정욕망 없이 그저 손을 내미는 것으로 시작되는 접속과 연대, 그리하여 절망적인 상황을 웃어넘길 수 있게 해 주는 촉발 / 변용 등.
<풀 몬티>는 이처럼 시선을 통해서 실업과 신체를 다룸으로써, 그것의 옷을 벗긴다. 실업이란 이름의 저주를 드러내고, 그 저주의 시선이 발생하는 지점에 노동에 대한 찬미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선이 대상이 된 신체에게 가해지는 시선의 권력을 보여주고, 그 시선이 발생하는 지접ㅇ 자리잡고 있는 남근중심주의를 드러낸다. 옷을 벗기려는 시선. 그렇기에 그것은 옷을 벗지 못하게 한다. 망설임과 동요끝에 옷을 벗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종류의 시선이 나타난다. 그것은 옷을 벗기지 않는 시선이다. “옷을 벗기려는 시선은 옷을 벗기지 못하고, 옷을 벗기지 않으려는 시선은 옷을 벗긴다”는 역설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 pp.273~275
<풀 몬티>는 시선에 관한 영화다. 실업을 명시적이고 직접적인 소재로 하고 있지만, 실업의 문제를 다루 때조차도 이 영화는 시선의 문제로서 다룬다는 점에서 시선에 관한 영화다. 실업자를 보는 타인들의 시선, 실업자를 보는 가족들의 시선, 실업 당한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시선. 물론 시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외부를 놓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실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본의 저주, 그 저주받은 자들의 고달픈 삶 등. 그러나 빗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과 달리, 그 고통스런 삶에 감정이입하기보다는 스트립쇼라는 항당무계한 '대책'을 통해 그것을 쉽게 웃어넘기도록 한다. 남의 고통에 동조하여 '대책'을 통해 그것을 쉽게 웃어넘기도록 한다. 남의 고통에 동조하여 고통을 '낟누도록' 하는 것과, 고통스런 처지를 웃으면서 잊게 해주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좋은 방법일까?
또한 <풀 몬티>는 실업을 빌미로 남성들을 스트립쇼의 무대로 몰고감으로써 이들을 다시 한번 시선의 장 속에, 하지만 다른 종류의 시선으 장 속에 밀어 넣는다. 신체, 아니 육체를 보는 시선들, 그리고 그런 시선으로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는 자신들. 이 시선은 이들을 옷을 벗는 쇼로 유혹한 것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 시선이 이들로 하여금 옷을 벗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시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외부를 놓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고립되어 더욱 고통스런 복수의 신체들을 하나의 새로운 신체로 묶어주는 끈, 아무런 인정욕망 없이 그저 손을 내미는 것으로 시작되는 접속과 연대, 그리하여 절망적인 상황을 웃어넘길 수 있게 해 주는 촉발 / 변용 등.
<풀 몬티>는 이처럼 시선을 통해서 실업과 신체를 다룸으로써, 그것의 옷을 벗긴다. 실업이란 이름의 저주를 드러내고, 그 저주의 시선이 발생하는 지점에 노동에 대한 찬미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선이 대상이 된 신체에게 가해지는 시선의 권력을 보여주고, 그 시선이 발생하는 지접ㅇ 자리잡고 있는 남근중심주의를 드러낸다. 옷을 벗기려는 시선. 그렇기에 그것은 옷을 벗지 못하게 한다. 망설임과 동요끝에 옷을 벗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종류의 시선이 나타난다. 그것은 옷을 벗기지 않는 시선이다. “옷을 벗기려는 시선은 옷을 벗기지 못하고, 옷을 벗기지 않으려는 시선은 옷을 벗긴다”는 역설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 pp.273~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