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이라는 딜레마를 자발적인 질서를 통해 해결하는 데 제약을 가하는 또 다른 요인은 권력과 정의에 관한 문제다. 비공식적인 사회규범은 한 집단이 종종 부, 권력, 문화포용력, 지적 능력이나 노골적인 폭력 및 강압을 이용해 다른 집단을 위압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규범이 한 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규범이 자유로운 흥정의 결과가 아니므로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런 규범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발적인 측면이 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노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겠지만, 사람들은 노예제도가 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패전했을 경우 노예로서의 삶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전통사회의 많은 여성들은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을 때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전제정치를 합법화하는 규범은 억압에서 비롯됏을지 모르지만, 언제나 억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회규범은 구성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정의롭지는 못한 경우가 있다. 규범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공정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어떤 사회과학도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다. 20세기 철학이 처한 딜레마는 법으로도 그것을 판단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문화 상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조류가 출현하면서 어떤 문화적 대안도 다른 것들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됐다. 자유주의 형태가 더욱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띨수록 개인별 취향을 놓고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워진다. 사람들의 취향이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충돌하지 않는 한 어떤 권위로도 그것을 비합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pp.334-335
현대 정보화사회의 민주주의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 가운데 하나는, 과연 민주주의가 기술적·경제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까지 라틴아메리카, 유럽, 아시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가 줄지어 등장했고, 과거 공산권에서는 새뮤얼 헌팅턴의 표현대로 또 다른 「제3의 물결」인 같은 종류의 민주주의가 밀어닥쳤다. 내가 앞서 《역사의 종말》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치제도가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방향으로 진화해가는 배경에는 유력한 논리가 깔려 있으며, 그 논리는 경제적 발전과 안정된 민주주의 사이의 상관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세계의 선진경제국에서는 정치와 경제제도의 수렴이 거듭해서 이뤄졌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봐온 자유주의적 정치·경제제도를 대신할 분명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 pp.401-402
우리는 앞 장에서 범죄의 증가가 가족구조의 붕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사회의 불신풍조도 어느 정도는 가족구조의 변화와 관련이 있음을 알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발생한 두 가지 급격한 사건으로 인해 지난 30년 간 사회의 가족구조는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하나는 성의 혁명(sexual revolution)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권운동이다. 이러한 변화를 아주 순수한 문화적 선택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우익진영에서는 가족 가치관의 붕괴를 슬퍼하고 있으며, 좌익진영에서는 전통적인 가족가치관이 남성 입장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는 산업혁명의 결과 이루어진 기술적·경제적 발전으로 엄청나게 큰 영향을 받았다. 물론 가족구조의 변화가 사람들의 자유 의지 또는 사람 개개인의 도덕적 선택에 영향을 받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도덕적 선택은 기술적·경제적 발전으로 생긴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기술적·경제적 테두리는 도덕적 선택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 pp.154-155
경제학자들이 사회학자들과 공유하는 믿음이 있다. 경제학자들은 우파적 입장인 반면 사회학자들은 대개 좌파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믿음은, 규범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규범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한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동등한 개인들 간 이성적인 협상을 통해 규범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반면 사회학자들은 강한 자(사회적 계급이나 성, 인종 또는 기타 지위적인 측면에서)가 약한 자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규칙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세기 사회과학을 지배해온 생각은 『사회적 규범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어떤 특정한 사회적 사실을 설명하려면 생물학이나 유전학보다는 「역사적으로 앞서 일어났던 사회적 사실」을 언급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기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점은 사회과학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른바 「표준 사회과학」모델에서는. 생물학이 신체에 대해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문화와 가치, 규범의 원천은 정신이며 이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다.
--- pp.243-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