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것이라면 교사의 설명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의 설명도 아이들이 배우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음은 다른 아이의 정확한 설명보다 저희들끼리 논의하는 과정과 그것을 학급 전체가 공유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중학교 2학년 과학 ‘물체가 우리 눈에 보이는 과정’에 대한 수업 시간이었다. p. 23
아이들에게 제시하는 질문을 이렇게 바꾸는 것이다. 시간이 지났을 때 수면의 높이가 달라진다는 것을 처음부터 제시하지 않고,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시간이 지나면 수면의 높이가 달라진다는 건가?’, ‘왜 그렇게 되는 거지?’라는 궁금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과제를 통해 아이들은 이런저런 결과와 그 이유를 옥신각신하면서 찾아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포화 수증기량’이라는 학습목표에 해당하는 얘기들이 나올 수 있게 된다. p. 27
학생들은 교사의 말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활동지를 풀게 한 후 답을 맞출 때를 생각해 보자. 교사가 답이라고 불러 주면 그 답이 자신의 생각과 조금 다르더라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것을 정답으로 인정하고 그대로 채점한다. 그런데 아이들 중 한 명에게 그 아이의 답을 칠판에 쓰도록 하면 나머지 아이들의 반응이 다르다. p. 35
교사들은 학생이나 다름없이 물었다. 그러면 수업 교사는 자신이 만든 활동지에서 다루는 사항들이 왜 필요한지, 왜 중요한지를 설명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다른 교사들은 활동지에 대한 의문과 의견을 반복해서 말했고, 활동지를 만든 수업 교사는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계속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활동지를 만든 교사가 자신의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토목공사를 다루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계속 제시했지만, 수업 교사는 꼭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빼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각자의 생각을 비교적 편하게 이야기했지만, 논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른 교과 교사들은 자신의 교과가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했고, 수업 교사는 꼭 지도해야 할 내용이라는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pp. 74-75
혁신학교 첫해를 마칠 때 서울시의 여러 혁신학교들이 모여서 사례 발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수업 혁신을 이루기 위한, 다른 학교와는 구별되는 우리 학교만의 중요한 특징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첫째는 공개 수업의 공동 설계였다. 다른 학교들은 공개 수업 횟수가 우리 학교보다 많았지만, 공개 수업을 수업 교사 혼자 설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른 교사들은 공개 수업을 참관만 했다. 다른 학교에서는 “참관할 때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학교에서는 공개 수업을 공동으로 설계하면서 다른 교과 교사들이 공개 수업을 참관할 때 무엇을 관찰할 것인지 구체화할 수 있었다. 또한 교사들은 공개 수업을 함께 설계하는 과정에서 다른 학급의 수업을 참관하고 피드백하며 수업설계를 수정하는 경험을 했는데, 이것은 일상 수업까지도 동료 교사의 의견을 들으며 설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가능할 때는 참관과 피드백도 이루어졌다. pp. 95-96
둘째는 교과가 다른 선생님들이 모여서 진행하는 수업모임(이하 ‘범교과 수업모임’)이었다. 수업모임에는 새로운 수업을 하려는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교과의 교사들이 모였는데, 그것이 우리가 하려는 수업을 설계하는 데 기존의 교과별 모임보다 알맞았다. 특정 교과의 수업을 만들 때 교과가 다른 교사들은 교실에 있는 다양한 아이들의 흥미와 수준을 반영했다. 다른 교과 교사들은 활동지의 초안을 보고 수업 교사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들을 보였는데, 그것은 결국 아이들이 보이게 될 반응과 유사했다. 아이들이 흥미롭게 참여하는 수업을 만들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였다. p. 96
모둠 과제를 제시하고 나서도 “얼마나 했어요?”, “이렇게 해야지”, 또는 “빨리 해요”라고 하면서 교사가 모둠 활동에 계속 개입하면 그 수업은 교사 중심 수업과 다를 바가 없다. 아이들은 또 다시 수동적으로 된다. 그러므로 일단 모둠 과제를 제시했으면 예정했던 시간까지는 아이들에게 맡겨 두어야 한다. 모둠에 자율성을 주는 것이다. p. 112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수업모임에 참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어쩌면 자발적으로 참여를 선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먼저다. 교사들에게는 수년에서 수십 년 동안 각자 만들어온 학생관, 수업관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를 들면서 그것을 갑자기 바꿔보자고 한다면 선뜻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수업 혁신이 진정으로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라면 그것은 점차 힘을 얻어가며 주위로 퍼져나갈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언젠가는 많은 교사들이 참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밀어 붙여서는 안 된다. p. 144
인선이의 이런 모둠 활동 능력을 본 것도 사실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과제가 그런 능력이 발휘되도록 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똑같은 과제를 준다고 하더라도 인선이만큼 하는 아이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제를 자주 제시할 때 다른 아이들도 인선이와 같은 모둠 활동 능력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인선이조차 이런 능력을 보여준 적이 드물었다면, 수업 혁신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의 수업은 아직도 아이들이 협력하며 해결할 만한 적절한 과제를 자주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