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슬픈 시로군요."
"젋은 여자들은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어요. 또 그런 분위기를 좋아해요. 그러면서 뭔가 강인한 느낌을 받게 되죠. 호리병 속의 무당은 안전해요. 어느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죽음을 기다릴 뿐이고, 저는 그 무당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저 이 시의 리듬이 좋아요. 아무튼 제가 의식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그 경계점이 어딘지에 관해서 연구를 시작했을 대 이 시가 떠올랐어요. 전 빅토리아 여성들의 공간적 상상력에 관해서 논문을 한편 쓴 적이 있어요. <의식 한계의 존재와 경게의 시(詩)>란 제목이었죠. 광장 공포증과 폐쇄 공포증에 관한 것인데, 말하자면 무한한 공간, 즉 황량한 늪지나 탁 트인 개활지로 나가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에밀리 디킨슨의 자의식적인 유폐나 무당의 호리병처럼, 더 이상 무엇 하나 침투할 수 없는 작은 공간 속에 갇히고 싶은 역설적 욕망, 뭐 그런 거죠."
"애쉬의 시에 나오는 지하 감옥에 갇힌 여마법사처럼 말입니까?"
"그건 달라요. 애쉬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벌하고 또 그가 사악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벌했어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사악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벌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 물론 그녀도 포함해서, 그런 사람들에 관해서 쓴 것입니다. 그녀는 그들의 판단에 어긋나는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애쉬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어요. 우리 독자들의 지혜에 내맡겼던 것이죠."
--- pp 120~121
"크리스타벨 라모트. 신화 수집가인 이시도르의 딸. <마지막 것들><11월의 이야기> 서사시 <요정 멜루지나>. 으스스한 작품이야. 멜루지나 알아? 영혼을 얻기 위해 인간과 결혼한 요정이다. 결혼하면서 남편에게한 가지 다짐을 받아 두었어. 토요일에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그녀의 모습을훔쳐봐서는 안되는 거였지. 그래서 남편은 수년 동안 그 약속을 지켰대. 그 사이 여섯 명의 아들을 보았어. 그런데 모두가 한 군데씩 기형인 아이들이었어. 요상하게 생긴 귀, 커다른 뻐드렁니, 한쪽 뺨이 붉거져 나온 고양이 머리, 세 눈, 뭐 그런 식이지. (...) 아무튼 그러다가 그 요정의 남편이 결국에는 열쇠구멍으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본 모양이야. 어떤 책에는 그가 뾰족한 칼로 철문에 구멍을 뚫고 봤다고 적혀 있기도 해. 그 여자는 대리석으로 된 커다른 욕실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대. 그런데 허리 아래가 바로 물고기, 아니 뱀이었다는군. 라블레는 그 모습을 일종의 큼직한 소시지 같은 '순대'의 모습이라고 했어. 틀리지 않은 상징일 거야. 미끈한 꼬리로 물을 찰싹이고 있었으니. (...)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온갖 상징적, 신화적,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가능해. 1860년대에 크리스타벨 라모트가 바로 이 멜루지나의 이야기를 매우 복잡한 장시로 엮어 1870년대 초엽에 출판했지. 참 묘한 시야. 어떻게 보면 괴상한 야수들과 숨겨진 의미들, 그리고 기묘한 성적 충동과 관능이 가득한 꿈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지. 페미니스트들이 홀딱 반해 버렸어. 성적으로 무능한 여성들의 드러나지 않은 욕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들을 하지. 사실 그 작품은 재발견되기 전에는 그리 많이 읽히지 않았던 모양이야. 버지니아 울프는 그작품을 알고 있었다는군. 그래서 그 멜루지나를 창조적 정신 속에 들어 있는 남녀 양성 소유의 이미지로 인용을 했다지 아마. 하지만 요즘의 페미니스트들은 또 다르게 해석을 해. 목욕하고 있는 멜루지나를 남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여성의 자기 충족적 성의 상징으로 보는 거야. 어때, 그럴듯한 해석이지? 초점은 어디에도 맞출 수 있어. 가령, 비늘이 덮인 꼬리에서부터 우주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 pp 7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