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는 천여 년 전의 문장가 최치원과, 백여 년 전의 구례 선비 황현의 자취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일찍이 중국에서도 문장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최치원이지만, 타고난 골품의 한계와 통일신라 말의 어지러운 정국에 제대로 능력을 펴볼 수 없었습니다. 학문이 깊고 시에도 빼어난 황현이지만, 망국으로 치달아 가는 조선에서 자신이 쓰일 자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시간은 천 년이건만, 그들이 느낀 절망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천 년의 세월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들어가며」중에서
“문장을 쓴다는 것은 진심을 담아내는 일이다. 문장을 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진심을 읽는 이에게 건넨다는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에게, 그리고 만나지 못한 옛사람과 만나지 못할 다음 시대의 사람들에게 지금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문장은 어떠한 것에도 종속되는 수단이어서는 아니 되며, 그러하기에 안에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문장을 쓰는 것은 어렵고도 고귀한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
--- p.35
“황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세대가 공부해 온 것처럼, 조선의 젊은이들이 경전을 읽고 옛 문장을 익히며 대구를 맞추어 시를 읊는 것으로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세월이 흘러 시대가 복잡해지고 보다 많은 사람이 골고루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욱 구체적이고 쓰임새 있는 공부가 필요했다. 시골집에서 상투 틀고 앉아 경전과 시문을 들여다보고 있다 하여 자칫 고루한 한학자로만 여기기 쉬웠지만, 황현의 가슴에는 이처럼 시대를 담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다.”
--- p.57
“을사년에는 절망하였지만, 그래도 아직은 할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바로 보라 깨우쳐 주고, 인재를 양성할 학교를 세우는 데 앞장서고, 조선 의병의 활동을 알리는 한편으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기렸다. 또한 지금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부지런히 기록해 뒷사람들에게 전하려 했다. 세상에 태어나 글을 배우고 익힌 자의 구실을 다하려 나름대로 애써 왔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날을 맞은 것을 보면,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더 해야만 할까?”
--- p.85
“황현은 약장 서랍을 열고 맨 밑에 두었던 약병 주머니를 꺼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기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아연(鴉煙)이었다. 아편이라고도 한다. 독약 아연을 독한 더덕주에 탔다. 그리고 평소의 작은 술잔이 아닌 큰 사발에 부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사발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입가에 대었다 떼었다 하기를 세 번쯤 했을 것이다. 그러다 단숨에 독주를 들이켰다. 어지러움과 통증을 참으며, 황현은 북쪽에 마련해 둔 이부자리로 갔다. 그리고 자리에 반듯이 누웠다.”
--- p.90~91
“서라벌을 떠나 뜬구름처럼 이곳저곳 유랑하던 최치원이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와 지낸 지도 여섯 해가 되어 간다. 사가의 큰형님이자 화엄의 고승인 현준(賢俊) 대사가 주지로 계신 절이었다. 산사의 들머리에서부터 거세게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다시는 세상일에 눈 돌리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p.106
“874년, 신라를 떠나온 지 육 년 만에 최치원은 당나라의 진사과에 당당히 급제하였다. 태학의 스승들과 동료들은 물론 자신도 놀란 결과였다. ‘십 년 안에’라 당부하신 아버님도 반드시 확신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당나라 명문가의 선비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급제하기 어려운 공부였다. 그런데 작은 나라 신라에서 온, 열여덟 살 소년 치원의 이름이 급제자 명단을 기록한 금방(金榜)에 어엿이 내걸린 것이다.”
--- p.123
“절도사를 대신하여 황소에게 보낸 격문에 나라 안의 문장가들이 그처럼 열렬하게 반응하고, 피란 간 당나라 황실과 조정에서 큰 상까지 내릴 줄은 몰랐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태학의 벗들도 소식을 듣고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이제 탄탄한 길이 열렸다며 모두가 부러워하는데 최치원 홀로 당혹할 따름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단번에 세상의 눈길을 끌거나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니었고, 황제의 기분을 후련하게 해 주었다며 선심 쓰듯 내리는 치사가 아니었다.”
--- p.157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최치원은 붓을 들었다. 귀국한 지 십 년째 되던 894년 초였다. 문장만으로는 세상과 사람들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 해도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이조차도 안 하고는 견딜 수 없었다. 무너져 가는 신라의 주춧돌을 다시 쌓아 보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시급히 정비해야 할 시무책(時務策) 십여 조를 써서 여왕께 올렸다. 신라의 관리로서 쓰는 마지막 문장이 될지도 몰랐다.”
--- p.170
“지천명의 쉰이 다가오고 있음은 최치원도 알고 있었다. 짐짓 모르쇠를 대긴 했지만, 하늘의 명에 대해서도 짐작이 갔다. 겨울은 봄에게, 저무는 해는 다음 날 떠오를 해에게, 그리고 낡은 것은 새로운 것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쇠한 신라도, 신라의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낡고 금이 간 데다 부피도 작아져 새로운 세상을 담을 수 없는 그릇은 바꾸어야만 한다.”
--- 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