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은 ‘문학에 대한 이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학의 콘텐츠가 인간과 세계의 ‘모든 것’이므로, ‘문학에 대한 이론’ 역시 ‘모든 것’들에 대한 이론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이론이 문학을 넘어 영화 비평, 미디어 비평, 정치 비평, 대중문화 비평, 철학, 사상 등 사유의 전 영역으로 확대되어온 역사가 이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문학이론을 공부하는 일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유하는 효과를 동반한다. 매우 ‘비전문적’인 학생들이 내 강의를 통해 ‘세상을 보는 다양한 패러다임’을 배웠다고 고백할 때, 나는 이론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가장 큰 환희를 느꼈다. 이 책을 통해 문학 전공자는 전공자대로, 비전공자는 비전공자대로 세계를 읽는 다양한 시각들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세계는 간단하지 않으며 모든 이론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모든 이론은 오로지 ‘국부적(local)’ 정당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우리는 다양한 이론들의 각축장을 통과함으로써 세계를 읽는 유효한 ‘사유의 그물들’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비평 언어의 매혹」중에서
현대문학이론에 대한 이해는 (문학을 포함한) ‘세계’를 읽어내는 다양한 패러다임을 익히는 일에 다름 아니다. 소위 ‘발상의 전환’이란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패러다임들은 다른 종류의 ‘맹목(blindness)’이 보지 못한‘통찰(insight)’을 제공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통찰의 이면에 맹목을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이론은 ‘총체적(total)’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국부적(local)’ 정당성만을 갖는다. 한 마디로 말해 ‘모든 것을 정확히 읽어내는 창(window seeing all things clearly)’은 없다. 우리는 수많은 문학이론들을 공부하면서 더 많은 통찰을 생산하고 맹목의 지점(blind point)을 지워나가는 도정에 있을 뿐이다. 이론들은 저마다 맹목과 통찰의 이면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폴 드망(Paul De Man)의 주장처럼 때로 맹목과 통찰은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 p.25
이 모든 소음들 그리고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형식으로 제한해서 이야기하자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만큼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 이론도 흔치 않다. 더욱이 문학의 생명을 “낯설게 하기”에 둔 것은, 새롭지 않으면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는 슬로건과 등치되면서 문예(예술) 창작 영역에도 나름의 큰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모더니즘의 단계에 이르러 작가들은 ‘형식의 고갈’을 이야기한다. 더 이상의 새로운 형식은 없다는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러시아 형식주의는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 p.66
수많은 현대 문학이론 중에서도 마르크스주의만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효과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총체성(totality)’의 개념이다. 문학을 별도의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와의 총체적 연관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입장은 모든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양보할 수 없는 최종적 입장이며, 마르크스주의가 갖고 있는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다만 문제는 문학과 세계 사이의 상관성을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고, 그 안에서 문학_세계 사이의 무게중심을 절묘하게 유지하는 일일 것이다. 문학 쪽으로 너무 무게가 갔을 때, 문학의 사회성, 역사성에 대한 해명이 취약해질 것이고, 세계 쪽으로 과도하게 중심이 이동했을 때,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 p.154~155
포스트구조주의가 대상의 다의성을 강조하면서 이제 그 누구도 사물에 대한 손쉬운 해답을 내놓기 어려워졌다. 사물은, 삶은, 역사는, 세계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세례 와중에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것은 근대적 ‘주체’ 개념이다. 주체 이전에 언어가 존재하고, 주체 이전에 구조가 존재하며, 주체 이전에 권력이 존재한다는 성찰은 주체의 지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구주주의는 근대적 주체에 대한 턱없는 신앙에 대한 야유이고 희화화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푸코나 들뢰즈/가타리가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는 다양성에 토대한 집단적 혹은 미시 정치학적 주체 개념은 하나의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주체는 믿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니만큼, 주체에 대한 근대적 ‘신앙’은 이제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삶의 주인이자 대상이 곧 인간인 만큼 엄정하면서도 정치(精緻)한 주체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은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모든 사유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 p.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