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고통에 찬 삶이 싫어도 하나님은 날마다 말씀하셨다. 「매일성경」으로 매일 묵상을 해오고 있지만, 이제는 「매일성경」 없이도 성경을 매일 묵상한다. “「매일성경」으로 묵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매일 읽으시기 바랍니다”라는 「매일성경」의 문구처럼 말이다. 그만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삶이 몸에 배고 익숙해진다. 그러나 하나님 마음을 아는 깨달음은 점점 멀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하나님을 묵상하기보다 묵상하는 내 자신을 묵상하려는 순간이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하여 「매일성경」이 스스로를 부인하고 성경을 앞세우듯, 나도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알고 닮아 가는 삶에 다시 나를 드린다.
--- 「1. 나의 묵상 여정」 중에서
묵상도 나를 ‘낡은 나’에게서 벗어나게 하는 여행이자 휴가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토마스 키팅 신부는, 기도란 “나를 벗어나는 짧은 여행”이라고 했다. 기도가 자아의 습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나를 벗어나는 여행이듯, 묵상은 항상 ‘나를 벗어나는 짧은 여행’으로 나를 이끌어 준다. 이 짧은 여행을 통해 옛 습관에 매이고 눌린 나의 죄짐을 벗어 버린다. 여행으로 일상을 벗어나듯 묵상을 통해 옛 습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여행을 떠나 쉼을 누리듯 늘 무거운 짐에 시달리는 내 삶이 묵상을 통해 참된 안식을 얻는다.
--- 「4. 묵상과 여행의 공통점」 중에서
뇌경색에 이어 아내의 다리마저 화상으로 잃었을 때, 늦은 밤 병원 안 성당을 찾아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 좀 그만 때려!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개척 안 한다고 했잖아, 에이씨!” 바락바락 악다구니를 해대며 하나님에게 대들었다. 예전엔 나를 부드럽게 대하시는 하나님에게 익숙했지만, 고통 중에 성경은 내게 거친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쳐 주었다. 뾰족한 가시가 되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찌르심에 내 안의 검은 피가 빠져 나가는 것을 그땐 몰랐다. 아프다고 악다구니만 쳤지, 그것이 내 속의 어둠을 드러내고 몰아내는 수술이자 치료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내 안의 죽은피가 생명의 피로 수혈을 받았다.
--- 「6. 한 구절로 묵상하기」 중에서
리더의 권위는 경청에서 나오는데 정작 국민의 아픈 탄식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리더십’은 한 사회를 불행하게 한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을 가졌지만 들을 수 있는 귀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여유가 없는 꼰대들의 미숙한 자기주장은 공동체를 깊은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왜 이렇게 주변에 귀 기울일 줄 모르는 꼰대가 많아지는 걸까? 사회만 그런 게 아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사람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못하는 ‘영적 꼰대’가 늘어나는 걸까?
--- 「8. 묵상과 영적 ‘꼰대’」 중에서
아내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생긴 버릇이 있다. 아이들이 할 일을 자꾸만 말로 챙기는 것이다. 내 편에선 그저 아이들의 일상을 챙기기 위해 순서대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러면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 개고, 세수하고, 묵상하고, 밥 먹고, 양치질 하고, 옷 입고 가방 챙겨서 가면 된다. 늘 반복하는 일들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마음에 뿌듯함이 밀려오고, 이제 식기가 수북이 쌓인 개수대로 향한다. 설거지를 깨끗이 끝내 놓고 ‘여유 있게 말씀 묵상해야지’ 하며 서두른다. 설거지를 잽싸게 마치면, 어느덧 지친 몸을 위로하고자 커피를 한 잔 내린다. 그 한 잔의 커피가 주는 묘한 즐거움이 있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다 보면 아이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갈아입고 내던져진 옷가지들, 엉망으로 꽂혀 있거나 나뒹구는 책들, 책상 구석에 벗어 던진 양말들….
--- 「10. 묵상의 방해물」 중에서
성경을 읽을 때 나는 애써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도 깨달음을 강조하거나 묻지 않는다. 성경을 읽고 토론하고 싶을 때는 평일은 삼가고 주말에 한다. 날마다 성경읽기는 꾸준함을 키우는 것이고 내가 깨닫게 하는 것보다 말씀이 깨닫게 하시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읽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성경읽기는 생수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다. 성경을 한 번 읽고 두 번 거듭 읽어도 내용을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읽기가 삶이 되면 부모가 깨닫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성숙한 아이들을 볼 것이다. 먹고 난 뒤에 소화된 음식이 신체를 자라게 하듯 읽기도 그렇다.
--- 「19. 아이들과 함께하는 성경읽기」 중에서
묵상의 복을 아직 다 누리지는 못했다. 언제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그분을 만나는 날이 올까. 묵상은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줄 뿐 아니라 다시 오실 그분을 기대하게 한다. 그것이 복된 삶이다. 그것이 진리 위에 사는 삶이다. 마지막 날에 주실 그 놀라운 복,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분을 뵙는 것이 가장 큰 은혜다.
그날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밀집해 있는 아파트단지 내에 요리조리 나 있는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듯, 인생의 골목을 굽이굽이 걷다가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날을 기대한다. 그날이 올 때까지 말씀을 믿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복되다. 가장 큰 복은 아직 남아 있다.
--- 「21. 묵상과 축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