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구는 내천댁이 오열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래, 이 사람아, 더 울어라. 울고 싶을 때 못 우는 거만큼 괴로운 기 어디 있겠노. 죽은 새끼를 위해서 울 만큼 울어야, 그래야 살아 있는 새끼들, 남은 새끼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새끼들이 눈에 안 비겠나. 울어라. 실컷 울어라. 강순구는 내천댁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 p.67
강순구는 분희를 따스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원폭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치여 죽어나간 사람들은 어쩌면 개미나 벌레나 지렁이에 불과했는지도 몰랐다. 운이 좋아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도 언제 어느 때 또 다른 수레바퀴에 치여 죽을지도 몰랐다. 원폭의 잿더미 아래서도 풀들은 다시 푸르게 되살아났다. 불에 타 깨진 기왓장 아래에서도, 무너진 벽 아래에서도, 시커먼 잿더미 아래에서도 잡초들이 솟아났다. 시커멓게 탄 나뭇가지에도 다시 잎이 돋아났다.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생명이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어쨌든 살아야 하고 목숨이 붙은 한 살아야 했다. 살아야만 하는 것이 목숨 붙어 있는 것들의 숙명이었다. 강순구는 분희가 수레바퀴에 짓이겨진 풀꽃이라 해도 질기게 살아남아 제 몫의 꽃을 피워낼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 p.191~192
“진달래가 참 곱더라. 니 생각이 나서. 줄 거는 없고, 꽃이라도 실컷 보라꼬. 니, 꽃 좋아한다 아이가? 맞제?”
분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철이 진달래 꽃가지를 분희에게 내밀었다. 꽃 한 송이를 따서 분희의 흉터에 살짝 갖다 댔다. 꽃잎이 흉터에 닿았다. 나비의 날개가 스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희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마치 동철이 흉터에 약을 발라주는 것만 같았다. 꽃으로 만든 약. 동철의 마음으로 만든 귀한 약이었다. 분희는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오늘 이 하루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면, 이 하루면 충분하다. 살아서 이런 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 p.233
매 순간 아들을 기억하면서, 아들이 못다 했던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왔던 세월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어쩌면 그것은 날마다 아들의 죽음을 새롭게 경험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아들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아버지. 아버지를 통해 김형률은 살아 있었다. 그것은 죽음을 통과한 사랑, 새로운 삶이었다. --- p.260~261
아, 어쩌면 강분희 할머니는 이 길고 긴 이야기를 통해 박동철이라는 한 남자에 대한 고백을 한 건지도 몰랐다. 나를 사람대접 해줘서 고마웠노라고, 사랑해주어서 고마웠노라고, 나를 살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마웠노라고. 어쩌면 박동철과 강분희 이 두 사람은 그 원폭의 지옥 속에서도 죽지 않는 꽃 한 송이를 피워낸 것인지도 몰랐다. 시들지 않는 노란 꽃송이 하나, 죽지 않는 꽃, 그것은 사랑이었다. --- p.287
삶은 금방 깨지는 유리컵처럼 연약했다. 살아 있는 순간만이 유일한 진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다는 것, 살아서 밥을 먹고, 살아서 노래를 듣고, 살아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한 시간이라도 더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누군가를 보살펴줄 힘이라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 p.393
인간이 하는 행동 중에 가장 어리석고 끔찍하고 추한 것이 바로 전쟁이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사랑이 아닐까. 사랑만이 전쟁과 죽음을 이길 수 있다. 사랑은 원자폭탄보다 힘이 세다. 사랑만이 원자폭탄을 이길 수 있다. 오직 사랑만이.
--- p.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