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집에 대한 태조의 주문이 놀라울 만큼 상세하다. 집 본채와 부엌은 기와로, 광이나 다락, 안사랑, 서방 등은 이엉으로 이으라고 하고, 동서남북 집의 방향과 건물의 배치는 물론 방의 칸 수도 정해 둔 것이다. 더불어 이 24칸 기와집에서 대대손손 영원히 거주하며 살 것을 기원하고 있다.
“… 주춧돌과 함께 구입한 허금의 집터 매매 문서를 상속해 주마.(숙신옹주 가옥허여문기 중에서)”
늘그막에 얻은 귀여운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면서도, 바로 옆에서 아버지 때문에 소매를 물어뜯고 있었을 다섯째 아들을 생각하면 참 얄궂기도 하다. 참고로 이 문서는 1401년인 태종 1년에 작성한 것으로, 당시 조선의 수도는 개성이었다. 처음 조선을 개국하며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그곳에서 형제들끼리 죽고 죽이는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조선의 2대왕 정종은 옛 수도 개성으로 돌아왔고, 이후 한양은 버려져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도 태조는 사랑하는 딸에게 개성이 아닌 한양의 집을 물려주었다. 이상한 결정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다.
---「이성계가 부동산을 투기한 사연은?」중에서
1588년의 초계 변씨의 별급문서에 따르면, 이순신의 집안은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 등등에 땅과 노비 22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에게 물려받을 재산이 있었다니! 사실 이 정도 재산 규모를 두고 아주 부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유명한 집안들의 분재기를 보면 가진 땅만 해도 수백에서 수천 마지기를 넘나 들고, 노비도 수백 명에서 천 명에 이르렀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땅과 노비가 있는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생각보다는 많이! 그럼 왜 이순신의 가족은 한양을 떠나 아산으로 갔을까? 서울에서 사는 것이 무슨 감투처럼 여겨지는 현대 사람이라면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일 수도 있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처가살이는 몹시 흔했다. 더군다나 친가가 가난하고 처가가 부자라면 특히 더 그랬다.
---「이순신은 편애로 유산을 많이 받았다?」중에서
권제는 첩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본처를 쫓아냈다. 또한, 첩이 낳은 자식을 극진히 사랑한 나머지 본처의 자식들을 때리고 괴롭혔다. 넷째 아들인 권람은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끝에 가출했고, 심지어 딸 하나는 아버지의 발에 걷어차여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권제가 중요한 일을 맡았기에 자식을 살해한 일이 묻혔다고 적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 그것도 존속살해 사건인데 그럴 수 있었을까? 아무튼 조강지처를 쫓아내고 자기 자식을 학대한 것만으로도 권제는 충분히 몹쓸 아버지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첩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에게 재산을 모조리 몰아주어 실록에까지 그 기록이 남았다.
“첩의 자식에게는 노비를 많이 주고, 적처의 자녀에게는 혹은 조금 주거나 혹은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예종실록〉 6권 중에서)”
---「서자에게 재산을 다 뺏긴 적자의 투쟁기」중에서
조선 시대의 소송을 이야기하는데 웬 춘향전인가 하겠지만, 이만한 고발 가이드북이 따로 없다. 단옷날 광한루에서 그네를 타는 성춘향을 본 이몽룡은 첫눈에 반해서 사랑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몇 번의 밀당을 거쳐 불타는 사랑에 빠진 이팔청춘은 만난 지 하루 만에 갈 데까지 다 가게 되는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아버지가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자 몽룡은 춘향에게 어쩔 수 없다며 이별을 고한다. 이때 춘향이는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면 몽룡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을까? 둘 다 아니다. 널 고소하겠다고 외쳤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소설이자 판소리이기도 한 《춘향전》을 보면 춘향이는 버림받은 신세를 슬퍼하며 한탄하는 대신 “내 이럴 줄 알았다”라며 대대적인 법정 소송을 준비하겠다고 외친다.
---「춘향이는 다 계획이 있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