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아무도 아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나는 긴 이어폰 줄을 오른손에 돌려 감고 더욱 힘을 주었다. 왼손으로는 팽팽하게 당겨진 줄 끝에 달린 이어폰 한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솜이불 위로 여자의 어깨를 찍어 누른 두 무릎이 덜덜 흔들렸지만, 내 다리가 떨리는 탓인지 아니면 여자의 몸이 거세게 버둥대는 탓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든 간에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무릎에서부터 격렬한 살의가 차올랐다. 몸속을 순환하는 피가 뜨겁게 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자의 숨이 잦아들수록 내 숨은 가쁘게 밀려 나왔다.
(……)
나는 요 위에 널브러져 조금씩 체온을 빼앗겨 갈 몸뚱어리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귓가에 속삭이는 익숙한 목소리를 기억하려 애썼다. 같은 노래를 리플레이 하듯 되풀이해서 떠올렸다. 이어폰에서 노래가 흘러 들어오는 순간 세상의 소음이 딱 멈추었던 것처럼 한 사람의 목소리만 귓속을 울렸다. 부드러웠다.
실수를 하면 모두 끝이다. 다음 시험이란 없다. 꿈꾸었던 다른 삶도 없다. 여자의 몸 위에 솜이불을 도로 덮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무도.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고,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깨끗했다. 더러운 일이었다면, 손을 더럽히는 일이었다면 아마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 pp.17-20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가장 나쁜 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삶, 아닐까. 오늘은 좋은 일만 상상하고 싶었다. 시험처럼 실패해 버리고 싶진 않았다. 붙거나 떨어지거나. 죽거나 살거나. 사랑하거나 외면하거나. 잡히거나 빠져나가거나. 인생은 매번 둘 중의 하나다. 중간은, 없다 --- p.23
차가운 목소리는 어느 곳에서든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다디단 목소리, 신혜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다들 지옥에 있다고 하지. 모두 너 때문에 내가 지옥에 있다고 욕하는데, 너 역시 지옥에 있다고 아우성을 쳐. 그러면 이게 다 누구 책임일까.”
(……)
처음엔 감자탕 국물의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고, 그다음엔 부드럽고 차가운 것이 입속으로 헤집고 들어왔다. 사람의 혀가 차가울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것을 따뜻하게 데워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게 빨아 당겼다. 마치 엄마 젖을 빠는 갓난아기처럼.
불현듯, 옆에서 끓고 있던 감자탕 냄비가 걱정이 됐다. 냄비를 잘못 건드리면 국물이 쏟아져 탁자를 짚은 손을 델지도 몰랐다. 하지만 너무 부드러워서 놓아 버릴 수가 없었다. 손을 덴대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불 위에서 끓는 냄비를 내버려 두고 달고 부드러운 아랫입술을 핥았다. 학원 옥상에서 아이스바를 빨아 먹는 신혜를 보았던 날부터, 혹시 그날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숨 막혀.”
입술을 먼저 뗀 사람은 신혜였다. --- pp.59-61
“기대를 받는 느낌이 어떤 건지 난 몰라. 그런 건 받아 보지 못해서. 그게 그렇게 나쁜 거였나.”
신혜가 중얼거렸다.
나는 오늘 저녁 식당에서 혼자 해장국과 소주를 먹던 남자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신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 남자가 뜨거운 국물을 떠먹으며 왼손으로는 물수건을 쥐고 이마를 닦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깍두기를 씹느라 우물거리던 입과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을 때마다 어김없이 구겨지던 미간, 벌겋게 익은 낯빛에 대해서도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 얼굴을 보면서 느꼈던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까지.
“난 네가 뭣 때문에 미래를 불안해하는지 모르겠어. 뭐가 그렇게 불안해 죽겠는지. 넌 나하곤 다른 사람이야. 말하자면, 차로 사람을 치어 죽여도 인생 종칠 일은 없다고.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뭘 가지고 있는지를 몰라.”--- p.63
엄마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남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기적이 자신에겐 쉽게 일어날 거라 기대하는지도 몰랐다. 엄마는 우리 가족이 특별한 클래스로 태어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별한 사람이 못 되는 나는 그러지 못해 불안했지만, 미안하지는 않았다. 낳아 달라고 애원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 번쯤은 평범하다는 게 어째서 죄가 되는지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때때로 기적을 상상했다. 기적이 온다면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기적을 가장 바라는 사람은 나일지도 몰랐다. 똑같은 실패를 반복해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모두가 기적을 기도한다면 불운은 누구 몫일까. 궁금했다.--- p.75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비겁한 인간이었다. 누나와 나 사이에 놓인 음식이 차갑게 식어 갔다.
“어쩔 수가 없었어, 나는.”
내 입으로 내뱉은 말이 부끄러워 눈앞의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죽어도 가야 하는지, 묻고 싶지도 않다. 네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아주 겁이 나.”
나는 고개를 들고 누나를 봤다. 누나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기를 씹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기 싫은지 시선이 식탁 모서리에 가 있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을 때 누나의 얼굴은 아버지를 닮았다. 그 눈빛, 인간이 아닌 사물을 대하는 차가운 시선. 나는 너를 몰라. 나는 너에게 관심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검은 눈동자. 주먹으로 때리는 것만 폭력이 아니라고, 안경 너머 작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고 싶었다.
우리 식구 가운데 나를 유일하게 이해한다고 믿었던 누나마저 결국 실망시키고 만 걸까.
(……)
“그런데, 그러니까, 네 인생이니까 남에게 휘둘리진 말았으면 해.”
“무슨 말이야?”
“나는 누가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싫었거든.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 누굴 만나러 돌아가는진 몰라도, 엄마 같은 인간을 네 인생에 또 만들어 놓는 건 그
렇지 않니? 누가 내 인생을 맘대로 흔드는 거, 정말 질색이다. 지긋지긋해.”
“오해야.”
컨베이어 벨트가 다시 움직이고 있고, 그 위에 올라탄 이상 무조건 따라가지 않으면 굴러떨어질 거라 말할 수는 없었다. 누나에게 신혜를 보러 돌아가야 한다고, 신혜가 트위터에 글을 올리지 않은 지 보름이 넘었다고, 불안해 미칠 지경인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고백할 수도 없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중전화로 신혜에게 전화를 걸어 보기도 했지만, 네 번 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국제전화를 받기도 곤란한 상황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 pp.112-113
양 사장은 둥글넓적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길고 가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데나 드나드는 놈이 더러워, 라는 말에 화가 치밀었어야 옳은데, 도리어 속이 시원했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더러운 놈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런 데 돈을 갖다 바치면서 쫓는 배신자는 나보다 더 더러운 년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짓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나는 어째서 이렇게 분하고 억울한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것은 정확한 답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심으로 후회한 적이 없었다.
--- 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