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길눈이 어둡구나.
외가에 맡겨진 지 얼마 안 돼 길을 잃어, 마을 사람의 경운기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모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수안을 불러다 이제 어딜 가든 둘녕이와 꼭 붙어다녀라 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 아이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이답지 않게 깊고 어두운 눈. 서로 나이가 같았던 이종사촌 자매 수안이.
--- p.7
장터에서 산 흔한 잠옷일 뿐이었지만, 오로지 잠을 위한 옷이 생긴다니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종일 입었던 내복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일이 왠지 고상하고 격식을 갖춘 일과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다음 장날을 기다리며 밤마다 책을 읽었다. 이모 내외는 둘 다 교사여서 외가엔 학교에서 가져온 읽을거리들이 꽤 꽂혀 있었다. 『소년중앙』, 『어깨동무』 같은 소년잡지와 마을 이장이 나눠준 『어린이 농민』 과월호도 열심히 읽었다.
--- p.28
그래도 수안과 내가 사는 세상은 그런대로 따뜻했습니다. 외할머니의 부엌엔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모두가 잠든 뒤에도 처마에 매달린 백열등은 꺼지지 않아 우리 방은 밤새 달빛보다 더 노란 빛으로 차 있었습니다. 나는 새삼 수안과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들어줄 사람이 삼촌 말고도 또 있으면 좋겠습니다.
--- p.36
또 하나 기쁨은 아빠가 소포로 우리가 읽을 만한 문고판 책들을 보내준 일이었다. 그 시절엔 아이들이 읽을 책이 그리 다양하지는 않았는데, 사는 형편이 괜찮거나 교육에 관심을 가진 집에서나 몇 가지 전집을 사들이곤 했다. 우리 방엔 사과 궤짝 두 개로 만든 책장에 계몽사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오십 권이 꽂혀 있었다. 수안이 모암분교에 입학하던 날 이모부가 사준 거라 했다. 전집을 수없이 되풀이 읽어 달달 외우던 참에 새로운 책들이 생겨 수안은 몹시 좋아했다. 나 또한 모처럼 아빠가 보내준 선물인 데다, 나도 외가에 보탤 것이 생겼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 p.92
수안의 뺨이 귀밑까지 빨개졌다. 애써 태연한 척해도 뉴턴과 헨델의 초상화를 구별하지 못한 게 창피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 외사촌은 피아노와 교습소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손에 쥐어본 고급스런 도자기 찻잔과 함께. 그리고 내게는 매일 한 시간씩의 기다림이 주어졌다. 수안은 내가 가매마을까지 함께 가주기를 바랐고, 나 또한 수안이 레슨을 마칠 때까지 교습소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실내를 희미하게 떠도는 방향제 냄새. 소파에 기대놓은 부드러운 쿠션. 마음대로 꺼내 읽어도 된다고 허락받은 ABE문고에서 『목화마을 소녀와 병사』, 『새벽의 하모니카』,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부엌의 마리아님』 같은 책들을 뽑아 읽기도 했다.
--- p.139∼140
“넌 너무 애어른 같아서 탈이지.”
웅이를 이부자리에 누이는 걸 보고 나는 조용히 안방을 나왔다. 어른들의 마음이 편해지는 방법은 내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구나 싶었다. 돈이 더 들더라도 나까지 걸스카우트를 시켜야 은이 이모 마음이 편해지는 거였다. 수안이도 좋아했고, 외할머니도 손녀들이 하겠다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둘이 같이 해서 잘 됐다며 기뻐했다. 내가 걸스카우트에 들어가는 일로 모처럼 온 가족이 안도하는 것 같았다.
--- p.189
나는 오히려 속이 후련해져 모자를 눌러쓴 채 책을 들고 바위로 향했다. 충하는 여전히 그곳에서 내가 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뒷부분은 다 못 읽었어.”
내가 내미는 책을 다시 밀어내며 소년은 입을 열었다.
“마, 마저 읽어.”
“여기서?”
안 될 것 있느냐는 눈빛.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남은 이야기를 읽었다. 처음엔 곁에 있는 소년이 신경 쓰였지만 차츰 아무렇지 않아졌다.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충하는 야영장 하늘 너머 멀리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 읽는 게 느리다고 재촉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땐 오수시간이 이미 끝나버렸다.
--- p.223∼224
사랑하는 고둘녕.
네가 스웨터를 짜고 있을 땐
나는 곁에서 같이 아늑해져.
넌 털실을 짜고
난 시간을 허비하지.
넌 물레를 돌릴 테고
난 딸기잼을 휘젓겠지.
축복할게, 내 사촌.
언제나 마법 같은 손길 지니기를.
수안.
가만히 방명록을 덮고 고개를 드는데, 내 스웨터 앞에 남학생이 서 있었다.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혼자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이 낯설지 않아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충하가 돌아섰을 때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 열여덟 살의 소년은 키가 훌쩍 커지고 어깨가 벌어져 어른처럼 보였지만, 물끄러미 응시하노라니 기억을 헤집고 야영장 비누 냄새와 계곡의 물 냄새, 밤의 모닥불 냄새가 흘러올 것 같았다.
--- p.359∼360
맞은편에서 다시 돌아보니 막내이모는 빵 봉지를 든 채 제과점 앞에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쨌든 고마워요.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아직도 날 좋아하지 않는구나 말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고 나는 속삭였다. 서로가 살갑지는 못했어도 한 번도 싫어한 적은 없었다고. 우리는 설명하는 데 서툴렀고 모든 관계에 서툴렀다. 다정히 다가가 등을 껴안으며 그동안 내 마음은 이러했답니다 고백하기엔, 저마다 진심을 전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 p.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