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조선과 기자동래설의 진실은 무엇인가?
(…) 논란은 기자조선이 실제로 존재했느냐는 점부터 시작된다. 기자조선 문제는 기자라는 인물에 대한 전설과 연결되어 있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주를 떠난 충신인 기자는 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상의 유민遺民을 이끌고 떠났다.
설화에서는 기자가 주를 떠나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기자가 동으로 도망하여 조선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예의 · 양잠 · 방직 · 팔조법금 등을 가르쳤다는 얘기도 있다. 이를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라고 한다. 이 내용들은 여러 사서史書들에 나타나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한漢 이전의 기록들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하여 믿지 않는 경향도 있다. 과거 기자동래설을 인정하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는 만주와 한반도의 청동기가 중국과 다르다는 점과 고조선 청동기가 기원전 10세기 이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기자는 그 이전 사람이라는 점 등이었다.
이러한 근거들이 뒤집힌 상황에서는 굳이 기자와 고조선의 관계를 끊으려고만 할 필요는 없다. 또 기자도 특정 인물로만 볼 게 아니라, 기자를 시조로 여기는 집단으로 볼 여지도 있다. 사실 고조선과 공통의 조상을 가진 상의 유민이 주에게서 벗어나려 할 때, 같은 문화를 가진 고조선을 찾았을 가능성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1장 〈문명과 역사의 시작〉
@ 고조선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10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2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보통 고조선이라고 하면 이른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이다. 이 중에서 고조선의 시작과 관련된 문제는 제일 먼저 세워진 단군조선의 성립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단군신화 등에는 그 건국연대가 기원전 2333년으로 전한다. 기록대로라면 중국의 초기국가보다도 훨씬 이른 시기에 나라가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은 이 시기를 믿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 그런데 최근 발굴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랴오허유역에서 이전까지 알려져 왔던 것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청동기문화가 발견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2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만주-한반도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기원전 10세기 이전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던 근현대 초기 발굴 성과를 완전히 뒤엎는 사실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문화는 상商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청동기문화의 공통 조상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이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밝혀졌지만, 아직도 이를 반영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 함께 한반도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도 만들어진 시대가 훨씬 이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한민국 교과서에서도 한반도의 청동기 유물이 기원전 15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인정하는 단계까지 왔다. 앞으로 더 올려볼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상태이다(여기에는 약간의속사정이 있다. 이전에도 한반도의 청동기 유물 일부는 만들어진 연대가 기원전 15세기 부근으로 나왔지만 그때까지 알고 있던 청동기 유물의 연대와 너무 달라 뭔가 잘못된 측정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해서 무시해왔던 것이다).---1장 〈문명과 역사의 시작〉
@ 임나일본부는 ‘임나’와 ‘일본부’로 구분되는 별개의 개념이다
이 문제에 관련된 학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전반 자신들의 기반을 지킬 필요성을 느껴 한반도 남부에 대한 대규모 정벌사업을 벌였다는 주장이다. 이게 바로 일본 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주장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전제조건이다. 두 번째는 신뢰가 떨어지는 『니혼쇼키』의 기록을 믿지 않고 거기에 나오는 가야정벌이 없었던 일로 본다. 이들 주장에서는 당시 백제의 비중을 크게 보지 않는데, 세 번째 학설은 이 정벌에 백제가 깊이 개입된 사실을 주목하여 그 중심세력을 백제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라는 존재이다. 이 실체를 보는 시각이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는 것과 직결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가장 먼저 제시된 학설은 진구 황후神功皇后가 가야를 정벌하고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문제가 너무 많아 그 후 다양한 대안이 나오게 되었다. 그 흐름은 크게 임나일본부가 설치된 시기와 역할을 제한해서 보는 학설과, 임나일본부를 백제가 만들었다는 학설로 나눌 수 있다. 이 계통에서는 백제가 가야를 정복하고 군사령부를 두어 지배했다는 설이 가장 먼저 제기된 학설이다. 이 학설에 대해 임나일본부에 소속된 관리가 왜인이고 백제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문제가 생기자, 백제가 가야를 직접 지배하기 부담스러워 왜인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는 이른바 ‘왜계 백제 관료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왜에서 설치한 기관으로 보되, 설치된 시기와 역할을 제한해서 보는 학설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학설들은 ‘임나’와 ‘일본부’가 별개의 개념이라는 점을 구별한 것이 아니다. 각 학설들의 약점은 이 때문에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근에는 백제가 10여 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있는 가야와, 그들과 별개의 세력인 왜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임나를 재편하고, 일본부를 설치하게 했다는 주장도 나온다.---2장 〈분열과 분쟁의 시대〉
@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는 ‘전투’에서 지지 않았다?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관산성管山城 전투이다.
관산성 전투
보통 이 전투에 대해 백제군이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고, 지금의 옥천지역인 관산성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져 백제군이 참패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는 달리 초반에는 백제군이 관산성을 함락시켰을 정도로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성왕도 전투 중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황과 상관없이 사비에서 관산성으로 오려 하다가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는 점을 주목하기도 한다. 즉, 백제는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백제는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관산성 전투 자체는 백제군에 그리 큰 타격을 준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로 인한 정치적인 타격은 컸다. 성왕은 물론, 성왕이 믿고 의지하던 측근들이 전사하는 바람에 백제 왕권의 지지기반이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거기에 반대하는 원정을 강행한 데 대하여 백제의 귀족들이 위덕왕威德王에게 압력을 넣어왔다. 위덕왕은 속세를 떠나 출가하겠다는 의사를 비침으로써 사태를 수습했다. 만류를 무릅쓰고 신라 원정을 감행한 책임은 귀족들이 지명하는 사람들을 대신 출가시키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백제는 여러 가지로 후유증을 앓으며 국가적인 전략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산성 전투 이전까지만 해도 고구려와의 공방전에 비중을 두어왔었으나, 관산성 전투 이후에는 신라와 공방전을 벌이는 비중이 월등히 높아진다. 관산성 전투 이전에 신라를 직접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2장 〈분열과 분쟁의 시대〉
@ 중국 황제에게 ‘책봉’을 받는다는 것-국제적인 인정인 동시에 외교전의 일부
책봉을 받는 측에서 실제 지배권 밖의 지역에 대해 인정을 받으려 하는 이유도 어떤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든가 지배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중국의 황제에게 책봉을 받는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다. 인정받는 과정에서 가급적이면 비중 있는 나라로 인정받으려 한다.
책봉이라는 것 자체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외교전이기 때문이다. 당시 백제만 하더라도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제의 태조에게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책봉을 받자, 동성왕東城王이 사신을 보내 복속을 청한 것도 이런 경우이다. 동성왕이 복속을 청한 것은 독립을 포기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남제에 대한 외교관계의 주도권을 일방적으로 고구려에 내주기 싫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조공과 책봉이라는 것이 이렇게 외교전의 일부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일방적으로 끊어버릴 수도 있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위에 조공을 하며 고구려를 토벌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도 들어주지 않자 조공을 끊어버린 경우도 있다.
이런 외교전의 와중에서는 책봉을 해주는 측도 상대국의 비중에 따라 책봉의 등급을 냉정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객관적이라기보다 책봉해주는 측의 이해관계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왜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송이나 남제 같은 중국의 나라에서는 왜를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비중 있게 대해주려 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왜는 항상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한두 급 정도 아래의 등급으로 책봉을 받고 있었다. 국제적으로 비중이 큰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도 못했고, 다음 시대인 수 · 당대에 비해 큰 효과를 거두지도 못했다. 결국 왜의 5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며 교섭한 것은 어떻게든 국제사회에 진출하면서 선진문물의 도입선을 다변화하려는 노력이었을 뿐인 셈이다.---2장 〈분열과 분쟁의 시대〉
@ 신라가 당을 이긴 것은 정치적인 안정이 원인이 아니라 토번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라가 당과 싸워 사실상의 승리를 거둔 원인으로 정치적 안정을 꼽는다. 하지만 굳이 신라만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강대국 당의 압박을 견디어낸 것 같지는 않다.
신라가 대제국 당의 압력을 견디어냈던 그 원인을 아시아 전체적인 정세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이 전쟁에서 당의 신경을 심하게 건드렸던 세력으로는 지금의 티베트에 있었던 토번吐蕃을 꼽을 수 있다.
토번은 660년 당이 백제 원정에 나선 틈을 타서 당 제국 서에 자리잡고 있던 토욕혼吐谷渾을 정복했다. 그 후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이를 계기로 결국 당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당이 고구려 정벌까지 끝낸 후, 토번 으로 칼끝을 돌린 670년 3월 신라가 당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도 바로 이 틈을 노린 조치였다. 670년대 내내 계속된 당과 토번의 전쟁은 신라와 당의 전쟁에도 여파를 미쳤다. 당과 토번의 전쟁이 치열해지면 신라와 당의 전선이 소강상태가 되고, 토번 이 안정되면 신라에 대한 당의 공세가 강화되었다.
신라와 당의 전쟁이 끝나게 된 것까지도 결국 토번 사정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676년 토번 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당이 대규모 토번 정벌에 나섰고, 이 때문에 반대에 있는 신라와의 전쟁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3장 〈통일의 시대〉
@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 -일본의 위상의 과대평가
견수사는 스이코推古 천황 시기 섭정으로 있었던 쇼토쿠聖德 태자의 지시에 따라 파견되었다. 600년에 첫 번째 견수사를 파견한 이후 618년까지 5회에 걸쳐 보냈다. 기본적으로는 수에 보내는 조공사절朝貢使節이다.
견수사 파견의 기본 목적은 중원을 통일한 수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며,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다른 차원의 문제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왜는 중원과 직접 교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반도, 특히 백제에 선진문물 도입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와 교류한다는 것은 선진문물 도입선의 다변화라는 의미도 있었던 셈이다.
이때 수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두고 왜의 기개나 적극적 외교 자세로 높이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국서의 첫머리에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고 쓰여 있었다는 점을 두고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이는 천황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근대적 시각으로 과대포장한 흔적이 뚜렷하다. 다른 나라에서 왜로 파견되는 사신의 지위는 대부분 하급관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당시 왜의 위상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3장 <통일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