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둘러싸고, 자기에게 야유나 멸시의 눈총을 보내는 모든 사람들을 증오하고, 결국은 자기 이외의 사회적인 인간 관계의 모든 것이 적같이 느껴지는 순간, 그는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급격히 치밀어 대외적인 적의가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로 변하고, 그것이 또다시 죽음에 대한 반발로 급변하는 미묘한 심리의 움직임을 어떤 이론적 근거에서보다도 체험의 과정에서 의식하는 것이었다. --- p.47
의사의 말대로 한다면 심장의 고동이 24시간을 지탱해낼 것같지 않다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대로 믿는다면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숨가쁜 고비에서 나는 그에게 과연 무슨 말이나 행동을 표시할 수 있는 것일까. 다만 그를 살리는 길이 있다면……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다. 아무 걱정 말고 안심하고 누워 있어요. 선생님 말씀이 차츰 좋아진다는데…… 기껏 이런 말을 하다니, 이게 무슨 맥빠진 허위의 잠꼬대인가, 라고 나는 자신을 나무랐지만 그 이상의 아무것도 찾아낼 길이 없다. --- p.98
어머니는 퇴색한 검은 물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뱃가죽의 주름이 나이를 알리는 것 같아졌다. 열다섯 길 스무 길 되는 검푸른 물 속에 곤두박질해 들어갔다가도, 발을 툭 차고 다시 솟구쳐올라와 서너 차례 휘파람을 불어제껴 길게 큰 숨을 뿜으면, 가슴 속이 후련하여 풀풀 뛰는 생선마냥 날래던 몸뚱이다. 그것도 이제는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한두 길 들어갔다 와도 금방 숨이가쁘다. --- p.110
앞일은 대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뛰어넘을 수가 없는 큰 바다가 가로놓인 것만 같았다. 풀어낼 수 있는 실마리가 전연 더듬어지지 않는 뒤헝클어진 상념 속에서 그대로 이인국 박사는 꺼지려는 짚불을 불어일으키는 심정으로 막연한 한 가닥의 기대만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채 천장을 멍청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지난 일에 대한 뉘우침이나 가책 같은 건 아예 있을 수 없었다. --- p.177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 p.200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하늘은 맑아지고 바람기 없이 후덥지근했다. 바다는 만조가 되어 둑 중턱까지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섬 너머 섬, 산 끝에 산모롱이 겹쳐, 굴곡진 병풍으로 둘러친 듯한 내해內海, 그러나 뱃길로 떠나면 그 틈 사이를 용케도 누비어 아득히 수평선이 보이는 큰 바다로 잇따랐다. 고요한 바다, 그것은 섬사람들에게는 평화로운 삶의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폭풍을 머금은 성난 바다는 죽음의 무덤이기도 했다. 가슴이 탁 트이게 늠름하고 시원하면서도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을 숨가쁘게 안겨다 주는 바다……. --- p.212
언제 종자 개량을 해보았던가. 새로운 농작물을 시험 재배해 보았던가. 꽤 까다롭게 한다는 축이, 겨우 이른봄이면 옆의 섬까지 배를 타고 가서 종자를 바꾸어 오는 일 정도였다. 그나 그뿐인가, 상처가 나면 장덩이를 붙이고, 배가 아프면 풀뿌리를 달여먹고, 고뿔 정도는 억지로 참아가며 날짜를 보내면 되었다. 맹장염이든 복막염이든 위궤양이든 몸을 땅에 붙이지 못하게 앓다가 죽어도 다 속탈이나 속병 한마디로 단정했었고, 결핵이든 늑막염이든 고질이 되게 몇 해고 누워 신음해도 가슴앓이로 통했다. 병세가 위독하여, 다 글러질 무렵에야 억지로 빚을 얻어 큰 섬 한방의를 찾아가거나 육지에 있는 도립병원으로 끌고 간댔자 이미 승패가 날 무렵, 기적이 없는 한 송장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그저 하늘을 믿고 땅을 의지하고만 살아왔었다. 어쩌면 그것이 아쉬운 대로 무식이 태평이라는 식의 안이한 평화였는지도 몰랐다.
--- p.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