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빈곤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가난하다는 것의 의미는 그들 ‘곁’에 있는 ‘우리’가 어떤 이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생산 노동에 참여하는 모든 성인 구성원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과, 오랜 세월의 노동이 축적한 어마어마한 능력 덕택에 수많은 구성원들의 개입 없이도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할 수 있는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똑같지 않다. 생산자들과 보편적 고용의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과, 평생의 계획이 노동이나 직업 능력 또는 일자리가 아니라 소비자 선택을 중심으로 건설되는 소비자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난날 ‘가난하다’는 의미가 실업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결함 있는 소비자의 처지에서 그 의미가 비롯된다. 이 차이야말로 가난한 삶을 경험하는 방식과, 그 불행에서 벗어날 가능성과 전망을 다르게 만드는 차이를 낳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근대 사회 산업화 단계에서 대부분의 남성들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과 성인 시절의 대부분을 노동에 바쳤다. (로저 수Roger Sue에 따르면, 1850년에 노동이 차지한 시간은 깨어 있는 시간 가운데 평균 70퍼센트였다.) 그 뒤로 일터는 사회 통합의 일차적 공간이 되었다. 다시 말해, 규범에 복종하고 훈련된 행동을 하는 습관이 교육되고 흡수되는 환경이자 ‘사회적 인격’이 형성되는 장소였다. 적어도 질서 잡힌 사회의 영속화와 관계된 모든 측면에서는 그랬다. 대규모로 징집되는 군대는 위대한 근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였고, 이와 함께 공장은 근대 사회의 주요 ‘파놉티콘 시설’이었다. 공장은 다양한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또한 모든 공장은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근대 국가의 국민들도 만들어냈다.
근대사회와 노동윤리
노동윤리는 이처럼 근대 제도를 일으키는 데에 결정적인 노릇을 했다. 근대 산업사회의 일상적인 활동과 영속화에 필수적인 자본과 노동의 상호 협력을 그 모든 구성원(더 정확하게는, 그 모든 남성 구성원)들의 도덕적 의무이자 사명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노동윤리였다. 노동윤리는 사실 불가피한 가난이었던 것?새 경제의 실행자들이 새로운 국가의 입법자들의 지지와 원조의 바탕 위에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려 했던 빈곤?을 기꺼이, 기쁘게, 열렬히 받아들이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그 빈곤을 흔쾌히 받아들인다는 건, 이해할 수 없고 고통스런 강요로 여겨지는 질서에 저항하기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일터에서 노동자들의 자율성은 용인되지 않았다. 노동윤리는 노동에 바치는 삶을 선택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노동에 바치는 삶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뜻했다. 선택이 허락되지 않고 선택이 금지되어 있다는 걸.
소비가 미학인 사회
요새 모든 당파의 정치인들은 한 목소리로 절실하게 ‘소비자 주도의 경기 회복’을 말한다. 생산 감소, 주문 감소, 중심 상업지구의 불황은 모두 소비자의 관심 또는 ‘소비자의 신뢰’(다시 말해 파산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를 만큼 강력한 소비자의 신용 구매 욕망)가 부족한 탓으로 몰아가곤 한다. 이 모든 문제가 일소되리라는, 경기가 활력을 되찾으리라는 희망은 소비자들이 다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책임으로 돌아간다. 소비자들은 다시 구매하려고 하고, 많이 사려고 하고, 더 많이 사려고 해야 한다. 상황이 정상적이고 제대로 돌아감을 확인하는 주요 근대적 잣대이자 사회가 계획대로 작동함을 알려 주는 주요 지표인 ‘경제 성장’은 소비자 사회에서 ‘국가의 생산력’(건강하고 풍부한 노동력, 넉넉한 재원, 자본가들과 경영자들의 대담한 기업가 정신)이 아니라 그 소비자들의 열망과 활력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날 개인의 동기와 사회 통합, 그리고 체제 재생산을 연결시키던 노동이 수행했던 역할이 이제는 소비자의 활동에 맡겨졌다.
‘부자는 보편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다’
지난날 보편적으로 숭배되는 영웅의 본보기였던 부자들은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그들의 삶은 그들이 철저하게 지켰던 노동윤리의 긍정적 결과를 전형적으로 드러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사례는 없다. 이제 숭배의 대상은 부 그 자체이다. 매우 다채롭고 풍요로운 삶의 방식을 보증하는 부.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는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다. 부유층의 사람들이 흔히 부러움을 사는 것은 삶의 내용물?살 곳, 함께 사는 배우자?을 선택하는 놀라운 능력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마음대로 손쉽게 바꾸는 능력이다. 그들은 결코 진로를 바꾸기에 이미 늦었다고 후회할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그 부의 ?물림은 결코 끝나지 않을 듯하고, 그들의 미래는 언제나 그들의 과거보다 내용면에서 풍부하고 훨씬 유혹적이다.
복지국가의 출현
복지국가는 여러 가지의 접점에서 등장했다. 스스로 또는 정치의 도움이 없다면 자신의 생존 조건을 재창조할 수 없는, 병들어 있는 자본주의 경제가 주는 압박, 또다시 스스로 또는 정치의 도움이 없다면 예측할 수 없는 ‘경기변동’에 맞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주는 압박, 사회 불평등의 가장 혹독하고 견디기 힘든 징후들을 완화함으로써 사회 불평등 원리를 옹호하고 재천명하라는 압력, 불평등의 재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을 변방으로 몰아냄으로써 불평등의 수용을 자극하려는 욕망, 그리고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경제의 파괴적인 영향을 국가의 구성원들이 견뎌내도록 도와주어야 할 절박한 필요들의 접점에서.
이 모든 강력하고 한 곳으로 집중되는, 그러나 서로 이질적인 동력들 덕택에, 근대(산업, 자본주의, 시장, 민주) 사회라는 특정한 발전 단계에서 복지국가의 출현이 ‘중층 결정’되었다. 복지국가를 현실로 일구어내고 오랜 세월에 걸쳐서 활기를 거듭 불어넣었던 압력들은 무척 막강했다. 그래서 일반 상식으로는 국가가 운영하는 복지의 제공이 선거로 당선되는 권력 형태나 일정 형태의 화폐와 마찬가지로 근대적 삶의 당연한 요소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위험한 계급, 가난은 범죄다?
‘최하층계급의 문제’와 ‘빈곤 문제’를 구분하는 것은 돌 하나로 새 여러 마리를 잡는 효과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효과는?소송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걸로 알려진 사회에서?최하층계급으로 분류된 이들에게는, 사회의 오작동으로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손해배상을 요구’할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소송에 따를 수 있는 모든 절차에서, 증명의 책임은 공평하게 ‘최하층계급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소송에 착수해서 자신들의 선의와 선해지려는 결심을 입증해야 하는 쪽은 그들이다.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최하층계급 사람들이 직접 해야 한다(물론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문해 줄 전문 변호사나 자발적인 변호사가 부족하지 않은데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최하층계급의 망령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뜻은 간단하다. 누구의 잘못인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스스로 책망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최하층계급 사람들의 사악한 선택을 가로막겠다는 결심이 모자라다는 것뿐이다. 그럴 때 더 많은 경찰, 더 많은 교도소, 더욱 가혹하고 위협적인 처벌들이 그 실수를 보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보인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느냐고 묻지 말라
정치적 전망의 부재와, 정치적 전망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는 정치 기구의 부재는 현재 더 불길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그 모든 측면(특히 분업, 부와 빈곤의 분배, 사회계급화)에서 우리의 지구적 범위의 상호의존성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격차를 메우지 못할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먼 곳에서 알지 못하는 이들이 겪는 불행은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행해졌거나 행해지지 않은 어떤 일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결과물일 수 있다. 그러나 멀리 있기 때문에 그것은 가까이에서 사람의 고통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그것만큼 강한 윤리적 책임을 환기시키지 않고 행동 의지를 자극하지 않는다. 부유층과, 부유층이 그 노동력을 사거나 또는 사지 않는 이들을 가르는 간극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 (세계 인구의 상위 20퍼센트가 버는 소득은 이미 하위 20퍼센트가 버는 소득의 114배이다.) 장소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면, 한 곳의 행복과 다른 곳의 불행 사이의 연관은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으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다. 상호 의존은 지구적일 수 있으나 윤리적인 의무는 변함없이 지역적이다.
역할이 없는 빈곤층
역사상 처음으로 오늘날 빈곤층은 근심과 골칫거리일 따름이다. 그들의 불행을 보상하기는 고사하고 불행을 없앨 만한 의미가 없다. 그들은 납세자들이 지출하는 대가로 제공할 만한 것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이익이 돌아오기는커녕 원금도 되돌려 받기 힘든 나쁜 투자처이다. 가까이 오는 것은 무조건 빨아들이고 아무것도 내뱉지 않는, 아니 어쩌면 문제만을 내뱉을 수 있는 블랙홀이다. 사회의 품위 있고 정상적인 구성원들?소비자들?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빈곤층은 전혀 쓸모가 없다. 아무도?지위와 발언권과 호소력이 있는 누구도?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빈곤층에게 돌아가는 것은 무관용원칙이다. 빈곤층이 빈민촌을 불 지르고 떠날 때 사회는 훨씬 잘살 수 있다. 그들이 없다면 세상은 그만큼 더 기뻐할 것이다. 빈곤층은 필요 없고 쓸모가 없다.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큰 가책이나 망설임 없이 버려질 수 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