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린다. 넘어진다. 엉뚱한 길로 빠진다. 산 사람을 찍어야 하는데, 어쩌다 죽은 사람을, 죽은 사람의 옛 사진을 찍고 있을 때가 많다. 산 사람의 터전을 찍어야 하는데, 어쩌다 죽은 사람의 뫼를 찍고 있을 때도 많다. 내 사진을 봐야 하는데, 모르는 사람들의 사진에 눈이 돌아간다. 사진에 길이 있을까. 이른바 ‘정도正道’가 있을까. 있다면 알고 싶다. 그 길을 피할 수 있도록. 시간 앞에 영원한 사람이 없듯, 영원한 사진이란 없을 것이다. 사람도 사진도 시간 앞에선 바스러진다.
---p.12 「노순택, '애도가 투쟁이 될 때'」 중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 원인이 권력과 맞닿아 있을 경우, 대개 죽음의 이유는 숨겨지거나 지워지곤 했다. 그럴 때 유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영정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것이다. 내가 가장 아끼는 이가 왜 죽었는지 이유를 모른 채, 그 죽음의 이유가 지워지는 이유도 모른 채 애도의 시간은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온전히 슬퍼해야 할 시간이 분노로 채워질 수밖에 없을 때, 그래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을 때,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영정은 가장 절실하고도 뼈아픈 구호가 된다. 살아있던 이들이 왜 갑자기 죽었냐고, 이들을 왜 계속 지우려고 하냐고, 이들을 기억해달라고.
---p.21 「박지수, '무덤과 무덤 사이'」 중에서
나는 자신의 반려동물을 위해 기도를 하고 사진 속의 동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납골당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한참을 서서 반려동물의 사진을 향해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고민을 나누었고, 또 어떤 사람은 죽은 개가 목이 마르지 않도록 매일 물컵의 물을 갈아주거나 노트 위에 그날의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편지에서 발견한 동물의 호칭은 대부분 누군가의 아들, 딸이거나 동생이었다. 인간관계의 호칭을 부여받으며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온 동물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이 사각형의 공간을 점유하며 부재의 자리를 대신한다. 묘지와 납골당은 사랑하는 대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공간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믿음을 매개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p.66 「금혜원, '구름 그림자 영혼'」 중에서
살아남은 인간이 자신을 초월한 불가해한 사태를 이해하려고 시도할수록 죽은 자들의 죽음과 우리 눈앞에 펼쳐진 참상은 오히려 멀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죽은 자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듯이 살아남은 자들은 그저 우연히 살아남을 뿐이다. 우연히 그 배에 올라탔고, 우연히 그 화장실을 사용하였으며, 우연히 그 거리를 걸었을 뿐이다. 죽음이 우연한 것이라면 생존도 우연한 것이다. 우리가 참사 앞에서 이러한 우연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의 우연한 생존이 위태로운 존재성을 현시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되살아나는 감각은 자신의 죽음성이다.
---p.101 「성다영, '존엄과 애도: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중에서
2014년 우리나라에서 그 배의 침몰 참사가 있었을 때 나는 이제 ‘바다’라는 말을 당분간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국민에게 늘 부끄러움을 견디라고 한다. 살아남은 자의 수치 말이다. 이 부끄러움 속에서 우리는 바다도 그 배의 이름도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수치스럽기 때문이었다. 왜? 우리만 살아남아서.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 독재정권을 거쳐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나는 수많은 수치의 시간들을 지나왔다. 행복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박애니 하는 좋은 단어들은 우리 국민이 쓸 수 없는 단어였다. 그것은 외국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단어였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국민에게 늘 살아 있는 수치를 감내하라고 했다. 그때 내가 ‘바다’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그것을 재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부터, 재현은 수치를 걷어낸 다음 가능하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p.105 「김혜순, '공장의 서정: 예술은 어떻게 애도를 감행하는가'」 중에서
몇 차례 연락이 왔지만 나는 끝내 애도를 회피했다. 무엇보다 나는 장례식장에 놓여 있을 그의 영 정 사진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영정 사진에는 고인이 된 이들이 침착하고 평온하게 또는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해서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에게 요구하는 표정이다. 우리는 죽음을 위로하는 한편으로 죽음이 우리를 위로하길 바란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마저도 삶의 얼굴을 띨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죽음의 얼굴로서 대면하고 그래서 피해왔던 그를 저 가상적 삶의 얼굴로 마주할 수 없었다.
---p.117 「유운성, '불가능한 포옹'」 중에서
우리가 누구를 애도한다는 것은 ‘죽은’ 그 사람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살았다면 살릴 수 있었던, 그러나 그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이 제 위태로워진 수많은 산 목숨들을, 그것들의 파괴되고 박탈된 생명을 애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산 자를 애도하는 것, 혹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목숨을 애도하는 것. 죽어 소멸한 자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현존하는 것들 혹은 머지않은 장래에 눈앞에 현존하게 될 것들을 애도하는 것.
---p.125 「김홍중,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것들에 대한 애도'」 중에서
언젠가부터 도덕적 심판장이 되어 버린 소셜미디어는 그것의 으뜸가는 이데올로기인 개인들의 무한한 네트워크로서의 세계라는 믿음을 강화하며 애도의 공간을 장악한다. 그것은 나와 피해자, 유족 그리고 다른 애도의 참여자들 사이에 놓인 직접적인 관계가, 애도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전부인 듯 둔갑시킨다. 이러한 애도의 플랫폼은 고통을 겪는 이의 이미지와 그를 지켜보는 나 사이에 놓인 연결을 확인하고 사색할 수 있는 힘을 더욱 빈곤하게 만든다. 소셜미디어라는 극단적으로 추상적인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오직 구체적인 인격적 주체만이 있다는 믿음과 손을 잡는다. 그리고 사진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굳건히 뒷받침한다. 사진은 피해자와 그를 애도해야 할 막연한 의무에 사로잡힌 이들을 소집하고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가 겪은 고통을 탈사회화한다. 사진은 피해자의 모습을 생생히 시야 속으로 밀어 넣지만, 그들이 겪어야 한 고통에 대해 우리를 눈멀게 한다. 그것이 오늘날 사진이 사자(死者)와 맺는 관계의 으뜸가는 원리라면, 사진이 수행하는 애도의 윤리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p.135 「서동진, '지금 사진은 어떻게 애도하는가 : 손택 이후 사진의 윤리'」 중에서
정신의학에서는 기념일 반응(anniversary reaction)을 주의 깊게 살핀다. 기념일 반응은 트라우마 상황과 연관된 날이나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찾아오는 우울, 불안, 신체적 증상을 일컫는다. 애도가 충분하지 못했을 때,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을 때 경험하는 매우 정상적인 반응이다. 피로 물든 달력 속 무수한 날짜들을 우물우물 곱씹으며, 나는 이제 나 역시 참사의 피해자임을, 겨우 안다. 당신도 그렇다. 우리는 무수한 ‘기념일’ 사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책임을 느낀다. 애도는 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신과 내가 피해자의 자리를 만들고 곁이 되어야 한다. 그 다짐은 수치를 모르는 권력 대 신 흔들리며 방황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우리는 끝내 애도를 ‘함께’ 발명할 것이다.
---p.141 「장일호, '애도의 윤리'」 중에서
상실과 슬픔, 우울과 기억의 혼돈 속에서 그들은 뒷이야기를 새로 쓰려고 한다. 같은 이름의 다음 고통을 막기 위해. 이들의 선한 의도는 언론이 좋아하는 영웅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우리가 오랫동안 바라봐야 하는 건 그들이 나눠주고 이식해 준 기억 자체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슬퍼할 수 있으려면 기억을 나누어야 하고, 필요한 만큼 충분히 오래 슬퍼하려면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언론이 하는 일은 겪은 이들과 겪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기억의 연결고리가 깜빡이다 꺼지지 않도록 기능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공적인 애도에 대해 적으려면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억을 듣고, 이야기로 꿰어서, 이해로 마음을 집어넣는 일이 쉬워지면, 슬픔을 나눈 공동체를 상상해 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도록.
---p.151 「김인정, '애도의 보도, 보도의 애도'」 중에서
당시 ‘희생자 대책위’를 만든 가족들은 질문을 던졌다. 가족을 잃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복수를 꿈꾸는 자, 냉소주의자, 은둔자, 테러리스트, 절망한 자. 그중 어떤 것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였다. 그리고 고독의 문제였다. 가족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 후에도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유족들은 고독했다. 유족들은 많은 것이 될 수 있었지만 정말 어려운 정체성을 택했다. 사랑하는 자였다. “아직 우리들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는 것 아닌가?”
---p.157 「정혜윤, '깨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 중에서
길 중간은 얼어 있었다. 사람이 파묻힌 채석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무덤가를 지나 숲을 헤쳐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는데 누군가 거듭 걸었던 풍경 같기도 누구도 찾지 않아 뒤에 남겨진 풍경 같기도 했다. 그건 기억이라기보다는 불가해하고 불가피해진 모든 것들, 곳곳에 얼어붙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은 마침내 발아래에서 깨지는 것들, 우리들의 애도가 되지 못하고 각자의 안에 갇혀 맴돌고 있는 무엇들을 닮아 있었다.
---p.256 「윤성희, '표지 없는 지도와 지워지는 사진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