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작은 기적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 순간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진에 담기 어렵죠. 비록 볼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분명 거기에 있어요. 어떻게든 사진에 담아 보고 싶어요.
---p.36 「노구치 리카, 인터뷰」 중에서
신중하게 구성한 정물 사진은 대부분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다. 더 섬세하게, 또 때로는 장난스럽게 다가서서 만든 이미지를 통해 주변에 평범하게 존재하는 순간과 순간 사이를 새롭게 발견하고자 애를 썼다. 모이면 우리의 일상이 되는 순간들.
---p.50 「소피에 순드, 작가 노트」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구처럼 집에만 있었지만, 그 어느 곳보다도 멀리 떠나온 것 같았다. 도심 한복판에서 혼자 외딴섬에 틀어박혀 있는 기분. 정상 속도로 흐르고 있는 세상에서 갈라져 나와 다른 차원의 세상에 와 있는 기분. 시간의 바깥에 놓인 정물이 된 기분. 이 기분 속에 계속 머물고 싶어 그로부터 한참 후 친구에게서 전화가 올 때까지 핸드폰도, 노트북도 열지 않고 침대에 가만히 누운 채로 잠들기 직전 읽다만 책에 대해, 깨어나기 직전 꾼 꿈에 대해, 그 책이 나의 무의식을 통과하여 그 꿈에 변형되어 반영된 방식에 대해, 평소였다면 스케줄러 맨 윗줄에 적힌 그날의 일정을 확인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바로 사라졌을 종류의 문제들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했다.
---p.99 「김혼비, '아주 완벽한 휴가'」 중에서
우리의 모터보트는 크림에 레몬즙을 한 방울 섞은 것 같은 색이었다. 바다와 모래는 물감을 뚝 떠서 펴 바른듯했다. 엄청난 소음과 물길을 일으키며 배가 달리기 시작할 때, 낡은 흰색은 예쁘구나 생각했다. 사람들의 맨발, 찰박찰박한 물, 몸에 달라붙는 티셔츠와 바람에 젖혀지는 셔츠, 따뜻하게 젖은 몸. 지금 나는 눈이 쌓인 도시를 걷고 있다. 거리를 다닐 때는 떨어지는 간판에 맞아 죽지 않도록 주의한다.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기 때문에. 아직 시작도 못 했기 때문에.
---p.106 「서한나, '내 여자의 열대'」 중에서
나와 다른 몸짓으로 느끼고 위험을 파악하고 숨 쉬는 생물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 이 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초원에서 풀을 뜯는 회색 갈퀴의 조랑말. 선명한 빛깔의 날개를 펼친 참매의 활강. 그런 걸 볼 땐 소설을 쓰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그런 존재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p.114 「김멜라, '웃음개똥짓짓새'」 중에서
자라나는 동안 내내 나는 성도 모르고 다시는 연락해볼 수도 없는 하나를 그리워한다. (…) 언젠가는 하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세월 속에 천천히 사라져간다. 하지만 어떤 냄새에, 빈티지샵에서 만난 마이리틀포니에, 초록색 눈을 가진 배우나, 소설 속에서 보는 ‘해나’라는 미국식 발음표기에 내 모든 기억은 한달음에 길어 올려진다. 신기할 정도로 세세히 아로새겨진, 그러나 아주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는 기억이 다시 떠오르면 어느 순간 나는 짧고도 강렬했던 유년의 터널을 또다시 한 발짝씩 걷기 시작한다.
---p.120 「손원평, '유년의 터널'」 중에서
영화에서 움직이는 풍경을 사용해 등장인물의 동요하는 감정을 표현하기는 상대적으로 쉽지만, 오즈처럼 멈춰진 정물을 통해 마음의 폭풍을 경험하게 하면서 그 순간을 초월적인 것으로 만들기는 극히 어렵다. 어쩌면 오즈와 세잔은 모두 정물의 본질을 일찍이 간파했던 것 같다. 한자로 정물은 고요 할 ‘정(靜)’을 쓰는데, 정은 푸를 청(靑)과 다툴 쟁(爭)이 합쳐진 글자다. 격렬한 동요 뒤 부유하던 모든 것이 가라앉은 맑은 상태를 우리는 고요함이라 부르고 있다.
---p.128 「김동령, '진동하는 정물, 세잔과 오즈 사이'」 중에서
다네가 꼽은 열세 편의 1970년대 영화들은 오늘날엔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간단히 모두 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방대한 영화 파일들을 ‘소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영화광들은 종종 동일한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그들은 언젠가 이 영화들을 모두 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정작 감상 행위는 자꾸만 유예하면서 또 다른 파일들을 찾아 모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팬데믹 시기에 강요되고 빠르게 퍼져나간 온갖 온택트 장치들은 이러한 상호수동성의 확산을 가속화했다. 기록과 기억이 모두 컴퓨터 네트워크 속으로 이양되고 통합된 상태, 말하자면 기록과 기억의 간극이 소멸된 상태,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영화의 장소를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p.214 「유운성, '지나치게 많은 기억들'」 중에서
사진 이미지가 기억이란 형태로 의식 속에서 머뭇거릴 때, 그것은 사진이 드러난 시각적 정보를 넘어 그를 보는 이에게 어떤 의미를 발신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알고리즘을 통해 ‘큐레이션’된 끝도 없는 이미지의 행렬은 질식하리만치 나의 순간적인 만족을 위한 이미지를 공급할 뿐이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이미지랄 것도 없는 감각적 폭력의 무력한 희생자가 되어 버린다. 이야말로 포스트-사진이 말하는 것보다 더 진실한 사진의 종말을 가리킬 것이다.
---p.221 「서동진, '‘글리치’ 이후: 귀여운 사진의 지겨움'」 중에서